정치

[이일우의 밀리터리 talk] ‘노예 페이’주고 예비군 정예화?

작성 2018.01.23 16:53 ㅣ 수정 2018.01.23 17: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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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비군 훈련에 참가한 예비군 대원들(사진=국방부)


‘열정페이’

청년들의 열정 또는 수습 과정이라는 구실로 무급에 가까운 급여를 주면서 노동력을 착취하는 것을 비꼬는 신조어다. 이 열정페이 문제는 지난해 최저임금 인상 논란이 불거졌을 당시 심각한 사회적 문제로 지적되며 정부 차원에서 해결해야 할 이른바 ‘적폐’로 끊임없이 거론되어 왔다.

새해 들어 정부는 이 같은 폐단을 바로잡겠다며 관계 법령을 정비하고 각 기업과 사업장에 대한 단속을 강화하고 있지만, 일각에서는 열정페이 근절에 앞장서야 할 정부가 열정페이보다 더 심한 이른바 ‘노예페이’에 가까운 제도를 운영하고 있다며 이에 대한 시정을 요구하고 나섰다.

일부 시민들이 국가의 ‘노예페이’ 문제로 지적하고 나선 것은 바로 예비군 훈련수당이다. 지난달 29일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는 예비군 훈련수당을 현실화시켜달라는 게시물이 올라왔다. 한창 일하거나 공부해야 할 시간에 무려 2박 3일이나 훈련을 받음에도 불구하고 지급되는 훈련수당이 너무 적다는 지적이었다.

실제로 2박 3일간의 동원훈련을 마친 예비군 대원에게 훈련 보상비로 주어지는 돈은 작년까지 고작 1만원뿐이었다. 지역훈련 대상자에게 지급되는 교통비 역시 7천원에 불과해 금쪽같은 시간을 쪼개어 훈련에 참가하는 예비군 대원들 개개인의 입장에서 보자면 이러한 수당과 여비는 사실상 아무 의미 없는 푼돈에 불과하다.

올해는 훈련 보상비가 대폭 인상되어 동원훈련 2박 3일을 마치면 1만 6천원을 받게 된다. 그러나 이 돈을 일급으로 환산하면 하루 5,300원 꼴이다. 하루 8시간 훈련을 받는다는 것을 전제로 5,300원을 시급으로 환산하면 시간당 662원이다. 올해 최저시급 7,530원의 10분의 1에도 미치지 못하는 생색내기용이라 부르기도 민망한 푼돈이다.

이 같은 돈을 받고 예비군 훈련에 입소한 예비군 대원들은 이미 병역의무를 마친 사람들이다. 그들은 2년간 자유를 박탈당하고 불편한 잠자리와 열악한 급식을 감내했으며, 햄버거 하나 사먹지 못할 5~6천원의 일당을 받으며 인생의 가장 꽃다운 황금기를 국가를 위해 희생했다.

그런데 국가는 그들에게 어떠한 보상을 주기는커녕 또다시 8년이라는 예비군 의무를 부과하고, 매년 소집해 예비군 훈련을 받도록 하는, 예비군 대원들 입장에서는 쉽게 받아들이기 어려운 희생을 또다시 요구하고 있다.

특히 동원예비군으로 소집되어 2박 3일간 병영생활을 해야 하는 사람들은 이러한 제도가 더더욱 불합리하게 느껴질 수밖에 없다. 매년 단 하루만 소집되어 훈련을 다녀오는 학생예비군과 달리 동원예비군들은 20~30대이면서 학생 신분이 아닌 사람, 즉 취업준비생이나 직장인, 자영업자처럼 1분 1초가 아까운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아무 보상도 없는 2년간의 병역의무를 다한 것도 억울할 이들에게 또다시 예비군이라는 올가미를 씌워서 8년이나 묶어두고, 일당 5천원을 보상이랍시고 지급하는데 예비군 훈련이 즐거울 리 만무하다. 많은 사람들이 ‘예비군’하면 연상하는 삐딱한 모습들이 바로 이러한 불만에서 출발한다.

예비군 대원들은 훈련에 불참하면 법적 처벌을 받기 때문에 싫더라도 귀한 시간을 쪼개 훈련에 참가해야 한다. 훈련 보상비는 최저시급의 1/10도 안 되는 수준이고, 급식의 질은 현저히 떨어지며, 막사는 낡고 불편하고 훈련 장비나 시설이 제대로 갖춰진 것도 아니다. 불만은 높고 사기는 낮은 예비군들을 대상으로 ‘조기 퇴소’라는 당근을 내걸고 적극적인 훈련 참여를 독려해도 기껏해야 한 두 시간 일찍 나가는 것에 불과한 이런 당근에 호응하는 사람이 많으리라 기대하는 것은 넌센스다.

지난해 7월 강원도 원주의 한 부대에서 발생한 ‘예비군 미아 사건’도 결국 이러한 문제가 배경으로 작용한 것이다. 국방개혁에 따른 병력감축으로 인해 현역 병력 부족 문제가 심각해져 현역 교관 및 조교 1~2명이 예비군 수백 명을 관리해야 하는 상황이다. 이런 상황에서 ‘노예’나 다름없는 처우에 불만이 쌓일 대로 쌓인 예비군들이 제대로 통제되리라 기대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최근 국방부는 오는 2022년까지 군 복무기간을 18개월로 줄이고 지상군 병력을 10만 이상 감축하겠다는 국방개혁 추진 방안을 발표했다. 현역 병력의 대규모 감축에 따라 병력 부족 문제를 보완해 줄 예비전력 정예화의 필요성은 그 어느 때보다 시급해진 상황인데 다급한 군과 달리 정부와 정치권은 문제의 심각성조차 인식하지 못하는 분위기다. 예비군 정예화와 처우 개선을 위해 예산을 대폭 늘려도 시원찮을 판국에 오히려 예산을 삭감했기 때문이다.

올해 편성된 예비전력 관련 예산은 1,325억 원으로 전체 국방예산의 0.31%다. 375만 명의 예비군을 유지하는데 1,325억 원, 1인당 4만 8천원 꼴이다. 군 당국은 예비군 처우 개선과 예비전력 정예화를 위해 예산 증액을 요청했지만, 정부와 국회는 전년도 예산보다 46억 원을 더 줄였다. 예비군 대원들이 표면적으로 직접 느낄 수 있는 훈련 보상비와 교통비는 소폭 인상해줬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예산들은 대거 삭감 당했다.

열악한 급식 식단 개선을 위해 약 87억 원이 요구된 예비군 급식비는 약 16억이 깎였고, 6.25 때 쓰던 수통이나 예비군 대원들의 아버지뻘 되는 연식의 탄띠 등 전투장구들을 교체하기 위해 약 112억이 요구된 전투장구 확보예산은 약 35억이 삭감됐다. 불편하기 그지없는 구식 예비군 막사 현대화 등 시설 개선을 위해 약 244억 원이 요구된 예산은 약 12억이 깎였고, 전역 후 살이 쪄 군복을 입을 수 없는 대원들을 위해 요구된 전투복 지급예산 1.8억은 전액 삭감됐다. 1인 2~3역을 하며 살인적인 근무 강도에 시달리고 있는 예비군 부대 기간요원들의 업무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 975명의 선발이 요구된 간부예비군 비상근 복무자 규모 역시 거의 반 토막 수준으로 삭감됐다.

이러한 ‘예산 난도질’ 덕분에 올해도 우리 예비군 대원들은 체격에 맞는 예비군복을 어렵사리 빌려 입고 예비군 훈련에 입소해 여전히 열악한 급식과 숙소를 제공받게 됐다. 박물관에 있어야 할 낡은 장비를 걸치고 페인트칠 벗겨진 낡은 훈련장에 들어선 수백 명의 예비군들은 이들을 통제해야 하는 1~2명의 현역 장병들이 목이 터져라 외치는 “선배님들, 제발 통제에 따라 주십시오” 소리를 들으며 한국군 특유의 ‘했다 치고’ 훈련을 마친 뒤 최저 시급의 1/10에도 못 미치는 훈련 수당을 받고 퇴소하게 될 것이다.

매년 약 40여 만 명 규모인 동원훈련 대상자들에게 최저시급을 적용해 일일 8시간 훈련에 일당 약 6만원씩을 지급하는데 필요한 예산은 720억 원에 불과하다. 예비군 훈련을 효과적으로 통제하고 예비군 부대의 운영 효율성을 높여줄 약 4,000여 명의 비상근 예비역 간부를 뽑고 유지하는데 필요한 돈은 약 60억 원이며, 훈련에 참가한 사람들에게 먹을 만한 식사를 제공하는 데는 연간 100억 원도 채 들어가지 않는다.


올해 정부 예산 규모는 약 428조 원, 국방예산은 약 43조 원에 달한다. 매년 전체 정부 예산의 0.05%, 전체 국방 예산의 0.5% 정도만 투자해도 예비군 대원들의 희생과 헌신에 보답할 수 있는 현실적인 훈련 수당과 양질의 식사, 구색을 갖춘 시설과 제대로 된 훈련 여건을 만들어줄 수 있다.

이 문제는 “예비전력 정예화”라는 명제가 아닌 청춘의 귀한 시기를 국가를 위해 헌신한 청년들에 대한 보상 차원에서 접근해야 한다. 정부 예산 관계부처와 정치권에서 관심이 없다면 375만 예비군을 비롯한 국민들이 나서서라도 우리 청년들의 희생과 헌신에 대한 보상을 당당히 요구해야 하지 않을까?

이일우 군사 전문 칼럼니스트(자주국방네트워크 사무국장) finmil@nat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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