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복(末伏)을 하루 앞둔 12일. 푹푹 찌는 더위 속에 비가 내린다. 시원한 막걸리 한 사발 들이키면 좋겠지만 여의치가 않다. 그런 날 오후, ‘국가대표 배우’ 하정우가 아닌 ‘사람’ 하정우를 만나고 싶었다.
세계 정복이 꿈인 ‘순수 열혈남’
“어렸을 때부터 세계 정복이 꿈이었습니다. 무엇이든지 하나는 꼭 세계 최고가 되어야겠다고 결심했었죠. 그 하나가 지금은 영화일 뿐입니다.”
우주 정복이 아닌 게 다행이다. 하정우는 2005년 ‘용서 받지 못한 자’로 스크린에 데뷔한 후 김기덕 감독의 ‘시간’과 ‘숨’에 출연하며 칸 영화제 등 해외 무대에 얼굴을 알리기 시작했다.
‘추격자’ 이후에는 ‘비스티보이즈’, ‘멋진 하루’, ‘잘 알지도 못하면서’, ‘보트’에 이어 ‘국가대표’로 쉴 새 없이 달려 왔다. 지금은 차기작 ‘티파니에서의 아침을’과 ‘황해’를 촬영 중이다. 만약 그의 꿈이 우주 정복이었다면 아마 지금쯤 슈퍼맨이 되었을 만 하다.
“전 사실 다작(多作)이란 표현도 맞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이제 서른 둘인데 한참 열심히 할 때죠. 배우로서 아직 매를 맞을 일도 많습니다. 지금은 그 맷집을 키우는 중입니다.”
이미 탄탄한 연기력으로 충무로의 인정을 받고 있는 그이지만 그가 더 없이 겸손해지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하정우의 목표가 바로 세계 정복 아닌가.
할리우드 진출 멀지 않은 ‘월드 스타’
“세계적인 배우가 되려면 중장기적인 비전을 세워 진지하게 고민하고, 또 계획을 세우고, 그리고 움직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무조건 열심히 하는 것만은 아니죠. ‘보트’도 그 계획 중의 일환입니다. (웃음)”
국내에서는 큰 주목을 받지 못한 영화 ‘보트’가 오는 22일 일본 개봉을 앞두고 있다. 영화 ‘보트’와 하정우에게 쏟아진 일본 언론의 관심은 대단하다.
“인터뷰 제의만 200개 들어왔는데 그 중 60여 개 밖에 못했습니다. ‘보트’의 원작자(와타나베 아야)가 일본인이라 어느 정도 관심을 모을 것으로 기대는 했지만 솔직히 이 정도일 줄은 몰랐죠. ‘추격자’에서의 제 연기가 인상적이었다더군요.”
그는 ‘보트’를 통해 일본을 시작으로 할리우드 진출까지 염두해 두고 있다. ‘보트’ 하나가 아닌 ‘보트’를 통해 자신의 다른 작품들이 보다 많이 알려지길 바라고 있다.
‘분노의 주먹’,’에비에이터’ 등으로 잘 알려진 마틴 스콜세지 감독과의 인연도 이런 그의 기대를 뒷받침 한다.
“평소 마틴 스콜세지 감독의 영화와 O.S.T 음악을 아주 좋아합니다. 여배우 베라 파미의 소개로 김진아 감독님과 함께 만날 기회가 있었는데 감독님이 저를 아시더라고요. 영화 ‘용서받지 못한 자’를 봐 잘 알고 있다며 감독님께서 준비중인 작품에 아시아배우를 캐스팅 할 예정이라고 귀띔 해주시더군요.”
막걸리 슬래시 즐겨 먹는 ‘의리파 사나이’
실제 마틴 스콜세지 감독 외에도 할리우드 메이저 스튜디오 몇 군데서 제의가 있었다는 하정우는 신의를 져버리면서까지 작품에 욕심을 내지는 않는다.
“정말 하고 싶은 작품이 있긴 했지만, 도저히 일정상 힘들었어요. 이미 다른 감독님과 작품을 하기로 약속했는데 신의를 져버릴 수 없잖아요. 앞으로 더 좋은 기회가 많을 것이라 생각하고 깔끔하게 포기했죠. 후회는 전혀 없습니다.”
만약 이기적이고 영악한 사람이라면 분명 쉽지 않을 결정일 터. 문득 그의 평소 생활이 궁금했다. 그러고 보니 어느덧 처음 그에게 갖고 있던 ‘배우 하정우’의 강인하면서도 냉정한 이미지는 전혀 느낄 수가 없다.
“막걸리 얼려 드셔보셨어요? 냉동실에 살짝 반쯤 얼려 슬래시처럼 먹으면 정말 맛있어요. 혼자 살다 보니 집에서 김치전에 막걸리 한잔 하는 게 그렇게 좋더라고요.(하하)”
‘사람’ 하정우의 눈빛은 추격자에서의 섬뜩한 눈빛도, 엄마를 찾기 위해 스키점프 국가대표가 된 입양아 ‘차헌태’의 눈빛도 아니었다. 솔직 엉뚱하면서도 진지한 고민을 할 줄 아는 ‘진짜 사나이’ 하정우였다.
서울신문NTN 조우영 기자 gilmong@seoulntn.com / 사진 = 강정화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