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이블 채널 tvN의 ‘롤러코스터’는 ‘이게 도대체 뭐하는 프로그램이야’ 하면서 보기 시작하는 방송이다. 워낙 낯선 형식 때문이다. 그러나 종내는 중독되기 십상인 프로그램이다.
특히 ‘남녀탐구생활’이라는 코너가 그렇다. 낯선 형식에 담은 소재나 내용이 실은 워낙 낯익은 것들이기 때문이다. 최근 이 코너는 케이블 프로그램 성공의 전형으로 꼽힌다. 공중파 프로그램과 철저히 차별화 하되 공중파만큼 시청자를 확보하라는 케이블 업계의 지상 과제에 충실해서다.
이 코너를 이끌어가는 주인공의 성공 요인 역시 마찬가지다. 밉지 않을 만큼 적당히 낯익고, 동시에 낯설다.
정형돈은 늘 대하는 얼굴이다. 그의 연기 또한 현실인지 연기인지 구분이 안 될 만큼 익숙하다. 반면 상대역은 낯설다. 조그만 얼굴에 긴 다리, 내숭 100단일 것 같은 능청스런 모습이다. 배역은 더 낯설다. 맨얼굴을 사정없이 드러낸다. 예쁜 여자 연예인이라면 절대 입에 올리지 않을 것 같은 비속어도 쉴 새 없이 쏟아 낸다.
그런데도 정가은(31)은 마냥 낯설지만은 않다. 마치 옆자리에 앉은 직장동료 같은 인상이다. 언행은 마치 어제 소개팅에서 만난 얄미운 여자와 닮았다. 술만 마셨다하면 무너지는 고교동창을 떠올리게 하기도 한다.
정가은이 이 예능 프로그램에서 맡는 역할은 늘 변하지만, 또 묘한 일관성이 있다. 이제껏 방송에서 볼 수 없었지만, 언제나 일상에 존재해 왔던 그런 모습이다. 그래서 더 매력적이다. 게다가 그 표정과 말투와 몸짓은 어찌나 잘 어울리는지. 그와 만나 이 늦깎이 신인이 요즘 들어 성공을 즐기는 법을 듣기로 했다.
약속은 낮 12시 30분. 서울 홍대앞의 한 미용실에서 촬영을 하기로 했다. 정가은은 20분 일찍 도착해 차안에서 김밥으로 끼니를 때우고 있었다. “죄송한데 밥 좀 먹을게요.”하면서.
시간이 되자 언제 그랬냐는 듯 웃으며 촬영 장소로 걸어 들어왔다. 생각보다 키가 컸다(173cm). 얼굴이 예상보다 너무 작아서 옆에 서기 부담스러울 정도였다. 일단 외관상으로는 프로그램에서 비치는 보통사람의 모습은 아니었다.
그러나 입을 열자마자 부산 사투리가 튀어나왔다. 억지로 사투리 억양을 억누르려고 애쓰는 모습에서, 그나마 보통 사람의 낯익은 면을 찾을 수 있었다.
시간이 흘러 기나긴 무명 시절의 낙담과 좌절에 대해 얘기할 무렵 그는 완전히 일반인의 면모를 보였다. 늘 어려움을 달고 사는 ‘남녀탐구생활’의 ‘그녀’ 같은.
-요즘 많이 바쁘죠?
“요즘은 좀 바쁘지만, 그렇게 된 것도 얼마 안됐어요(웃음). 처음 부산서 서울 왔을 때는 반지하도 아닌 완전 지하방에서 돈 없어서 밥도 못 먹고 창문 밖으로 지나가는 사람들 발만 보면서 살기도 했는걸요. 요즘은 집도 지상으로 옮기고 일도 생겨서 바쁘기도 하고, 살만해 진거죠.”
-롤러코스터 남녀탐구생활 인기가 대단해요.
“요즘은 식당 같은 데 가면 정가은이다, 하고 알아봐주세요. 너무 행복하죠. 누가 알아주나, 하고 쓱 둘러보기도 해요. 몰라주면 섭섭하기도 하고. 하하하.”
-신인이라고 하기엔 애매한 면이 있어요. 언제 데뷔 한거죠?
“부산에서 패션모델 활동을 하다가 2001년에 미스코리아 대회에 나갔어요. 연기는 2006년에 시작했는데 첫 촬영하는 날 감독님한테 잘렸어요. 사투리도 그렇고 연기도 너무 못한다고. 이 길이 내 길이 아닌가…싶어서 그 후론 연기를 하지 않았어요. ‘아줌마가 간다’라는 드라마였어요.”
-그럼 뭘로 먹고 살았어요?
“홈쇼핑 모델로 활동했어요. 일을 많이 해서 그런지 수입이 꽤 돼서 그 일에 젖어있었어요. 더 이상 발전이 없는 것 같아서, 같은 자리에 멈춰 있는 게 싫어서 또 도전하게 됐어요.”
-‘나는펫’이 재도전의 첫 작품이었죠?
“그 후에 스타킹, 그리고 무한걸스에 들어갔죠. 최종목표는 연기를 하는 거예요.”
-예능 프로그램에 주로 나가잖아요? 예능인 자질도 있는 것 같은데.
“예능 프로를 하다보면 왜 그런지는 모르겠는데 제가 바닥나는 느낌이에요. 개그맨들처럼 순발력이 없어서 그런 건지. 제가 실력이 모자라서 다른 사람들 기에 눌리는 건지. 또 아직은 어떤 분들과 하느냐에 따라 편차가 심해요.”
-롤러코스터에서는 굉장히 자신감 넘치던데요?
“제가 주인공인데다가 시청률도 잘 나오고 ‘내가 톱스타야’라는 마음가짐으로 촬영해서 그런가봐요. 스텝들도 다들 저를 그렇게 대해주시고요.”
-예능도 그렇게 하면 좋잖아요?
“예능 프로에 나가면서 더 절실하게 느껴요. 연기를 해야겠다는 걸요. 어떤 프로그램에 나가서 정가은이 하는 얘기와 자기 분야에 우뚝 서있는 사람이 얘기하는 건 다르게 들릴 수 밖에 없다는 걸 알게 됐죠. 송혜교씨나 김태희씨가 한마디 한 거랑 제가 열마디한 거랑 비교도 안되잖아요.”
-잘 하면서 왜그래요?
“제가 많이 소심해요. 연기를 하다가도 못한다 싶으면 울고 그래요. 하면 할수록 더 어려워요. 요즘도 촬영 중간 중간에 울컥하고 그래요. 친구들하고 웃고 떠들 때는 안그런데 방송들어가면 목까지 말이 올라오다가도 들어가요, 극소심한 A형이라니까요. 누가 뭐라고 한마디만 해도 내가 바보인가, 싶고.”
-송혜교씨 닮았다고 이슈됐을 땐 기분이 어땠어요?
“저한테는 무조건 플러스죠. 그래도 지금은 될 수 있으면 그런 얘기 안 나오도록 스스로 애써요. 녹화장에서도 사람들이 그런 얘기하면 말 돌리는 편이고요. 송혜교씨가 기분나빠할 것 같기도 해서. 네티즌들은 절더러 안문숙씨, 거미씨 닮았다고 하더라고요.”
-롤모델은 누구에요?
“현영씨요. 개인적인 친분도 있고 해서 언니가 조언을 많이 해줘요. 여자MC에 음반도 내고…다재다능하잖아요. 절더러 너무 남을 의식하지 말고 표현하라고 지적해줬어요. 언니가 하는 프로에 나가면 말도 잘 걸어주고요. 현영언니처럼 되고 싶어요.”
-그럼 현영씨같은 캐릭터로 밀고 나갈 건가요?
“캐릭터라는 건 억지로 만들 수 있는 게 아니라고 생각해요. 무한걸스 시작할 때도 제작진에서 캐릭터를 잡고 나가야 한다고 하더라고요. 제 성격대로 하다보면 잡히는 게 캐릭터인 것 같아서 미리 설정하지는 않았어요. 예능 프로에서 억지로 연기를 할 수는 없으니까요. 지금 제 성격이라면, 약간 엉뚱하면서도 소심한 게 캐릭터라고 할 수 있죠.”
정가은과 마신 와인 ‘디킨 에스테이트, 그린애플 모스카토’
모스카토 100%의 약발포성 화이트 와인. 가볍고 상쾌한 단맛이 있어 술을 잘 못마시는 사람에게 권할 만 하다.
서울신문NTN 이여영 기자 yiyoyong@seoulntn.com / 사진=이규하 기자
(촬영협조=CHARLIE‘S 미용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