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구

‘살아있는 전설’ 가네모토 기로에 서다

작성 2010.12.13 00:00 ㅣ 수정 2010.12.13 18: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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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10월 1일은 오릭스 버팔로스와 소프트뱅크 호크스전이 열린 날이다. 그러나 이날 경기의 승패를 기억하고 있는 이는 거의 없을것이다. 그도 그럴게 이 경기가 정규시즌 1위를 결정짓는 중요한 시합도 아니었고 더군다나 소프트뱅크는 이미 리그 꼴찌가 확정된 상황에서 치른 경기였다. 모처럼만에 리그2위에 오른 오릭스로서는 1위 세이부 라이온스와의 포스트시즌을 대비한 워밍업에 불과한 소프트뱅크전이었다.

하지만 이날 경기에 쏠린 관심은 전일본을 떠들썩하게 했음은 물론, 야구팬이라고 자처하는 사람들을 텔레비젼 앞으로 끌어모으기에 충분했던 이슈가 있었다. 바로 ‘일본프로야구의 반쵸(대장)’인 기요하라 카즈히로(오릭스)의 마지막 경기이자 은퇴식이 거행된 시합이었기 때문이다. 기요하라의 마지막을 보기 위해 스즈키 이치로(시애틀)가 태평양을 건너왔다는 사실로 미루어볼때 이건 단순한 은퇴식이 아니었다.

이날 경기에는 가수 나가부치 츠요시가 직접 경기장을 찾아 기요하라의 응원가이자 자신의 노래인 ‘톰보’를 직접 라이브로 부르며 대타자의 마지막을 함께 했다. 그때 눈물을 흘러던 기요하라 앞에 꽃다발을 들고 나타난 선수가 있었다.

바로 ‘오사카의 호랑이’이자 ‘살아있는 전설’로 불리는 가네모토 토모아키(한신)였다. 기요하라의 은퇴는 동시대를 함께 해온 가네모토 입장에서도 만감이 교차하는 순간이었을 것이다. 항상 옆집 아저씨와 같은 포근한 인상의 가네모토지만 그리고 철인으로 불리울 정도로 의지가 뛰어난 그였지만 어느새 가네모토의 눈가에도 이슬이 맺혀 있었다. 가네모토의 눈물은 어떤 의미였을까.

가네모토 토모아키라는 이름보다는 김박성으로 더 유명한 재일교포 3세인 그 역시 이러한 날(은퇴를 하는)이 멀지 않았다는걸 예감하고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기요하라가 야구계의 대장이라면 가네모토는 간사이 지방을 대표하는 ‘서쪽의 반쵸’다.

젊은시절 거의 무명에 가까웠던 가네모토는 아마츄어때부터 유명했던 기요하라를 동경해왔다.

고교시절 가네모토는 1년 선배격인 기요하라와 구와타의 PL학원(오사카 가쿠엔고교)이 고시엔대회에서 상종가를 달리며 인기몰이를 하고 있을때 기요하라의 모습을 구경하러 갔을정도로 엄청난 팬이었다고 한다. 또래들에 비해 야구에 소질도 없었을뿐더러 힘든 훈련을 소화하지 못하고 야구를 그만두기를 거듭했던 가네모토 입장에서는 고시엔 스타로 명성이 자자했던 기요하라가 동경의 대상이 된건 어쩌면 당연한 일.

프로지명을 받지 못했던 가네모토는 지인의 도움으로 어렵게 대학(동북복지대학)에 들어간 후 뼈를 깎는 자기 성찰을 통해 일취월장의 기량을 선보이게 된다. 일본대학 야구선수권에서 3년연속 팀을 준우승으로 이끌었던 그는 마지막 기회였던 4학년때 관서대학을 결승에서 물리치며 결국엔 우승을 차지한다. 별볼일(?)없었던 그의 야구인생에 터닝포인트가 되었던 순간이었다.

1992년 고향팀인 히로시마 토요카프에 입단한 가네모토는 탄탄대로를 달릴것 같던 기대와는 달리 공격과 수비 모든면에서 함량미달이란 평가를 받는다. 하체를 이용하지 못하는 타격폼, 그리고 부정확한 송구능력은 외야수로서 매리트가 없었던 선수였기 때문이다. 이 당시 관련자료를 찾아보면 그때 가네모토의 별명이 ‘두더지 죽이기’ 였다고 한다. 송구만 하면 어깨에 힘만 들어가 공을 땅바닥에 패대기쳤기 때문이다.

프로의 높은 벽을 실감한 그는 이후 하체의 근력강화는 물론 타격시 하체를 이용하는 방법에 온 힘을 쏟았다. 그리고 1994년을 기점으로 히로시마의 주전선수가 된 가네모토는 이후 에토 아키라(히로시마의 전설적인 강타자)의 요미우리 이적을 기회삼아 2000년부터 팀의 4번자리를 꿰찼다. 그리고 이해에 생애 처음으로 30-30클럽을 달성하기도 했다. 2001년에는 1,002 타석 연속 무병살타의 일본신기록까지 작성한 그는 공수주 3박자는 물론 찬스에서 가장 믿음직스러운 타자로 우뚝서게 된다.

2002년을 끝으로 FA(자유계약선수) 자격을 얻어 한신 타이거즈로 이적한 가네모토는 이적 첫해인 2003년에 한신을 18년만에 리그 우승으로 이끄는 등 맹활약을 펼쳤다. 비록 다이에 호크스(현 소프트뱅크)에게 일본시리즈 패권(3승 4패)을 내주긴 했지만 3경기 연속 홈런포를 쏘아올리며 총 4개의 일본시리즈 홈런을 기록하기도 했다.

하지만 영원할것 같았던 가네모토의 전성기는 2005년 리그 MVP를 끝으로 기록이 하향세에 있다. 물론 연속 경기 풀이닝(1,492경기)출전이란 대기록을 수립하며 기네스북에도 그 이름을 올리는등 ‘철인’으로서 존경의 대상이긴 하지만 말이다.

올해 야쿠르트와의 개막전에서 어깨부상을 당한 가네모토는 결국 4월 18일 경기(요코하마전)를 끝으로 연속 경기 무교체 출전기록도 중단됐다. 가네모토는 올해 전경기에 출전했다. 144경기를 뛰고도 규정타석에 들지 못한 것은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다. 12년연속 전경기 출전 기록을 이어가기 위해 대타로 출전한 경기가 많았기 때문이다.

선수가 은퇴를 하는 경우는 크게 두가지 이유때문이다. 하나는 체력적인 저하로 인한 노쇠화 그리고 뜻하지 않게 찾아오는 부상.

내년이면 한국나이로 44살(1968년생)이 되는 가네모토에겐 이 두가지 악재가 동시에 찾아왔다고 볼수 있다.

2년연속 1억엔씩 연봉이 감소한 가네모토의 내년 몸값은 3억 5천만엔.

한번 더 날기 위한 가네모토의 선수생활은 어쩌면 내년시즌이 분기점이 될 전망이다. 기요하라의 은퇴식에서 눈물을 보였던 가네모토 역시 영원할수만은 없는 인간이기 때문이다.

서울신문 나우뉴스 해외야구통신원 윤석구 http://hitting.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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