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쥐와 나방은 둘 다 인간에게 친근한 존재가 아니다. 나방은 징그럽고 박쥐는 흡혈귀 이미지 때문에 공포를 불러일으키는 존재다. 하지만 사실 박쥐는 주로 과일을 먹거나 혹은 작은 곤충과 나방을 주식으로 삼는다. 흡혈하는 박쥐는 극히 일부다. 따라서 사실 박쥐를 무서워해야 할 당사자는 인간이 아니라 나방이다.
나방은 나비목의 곤충 가운데 나비를 제외한 나머지를 총칭하는데, 16만 종 이상이 알려졌으며 다양한 새, 곤충, 박쥐가 나방과 그 유충을 먹이로 삼는다. 당연히 나방 입장에서는 다양한 방어수단을 개발할 수밖에 없다.
최근 과학자들은 나방이 자연계에서 다른 동물에서는 정말 보기 드문 방어 수단을 가졌다는 것을 입증한 바 있다. 즉 초음파로 먹이를 찾는 박쥐를 기만하기 위해서 같이 초음파를 발사하는 것이다. 과학자들은 재밍(jamming)이라는 용어를 사용했는데, 이는 본래 군사적인 목적에서 레이더 등을 방해하는 것을 의미한다.
플로리다 대학 및 플로리다 자연사 박물관의 과학자들은 박각시과에 속하는 나방들에서 이와 같은 초음파 재밍의 증거를 발견해 학계에 보고했다. 이 나방은 높은 주파수의 초음파(26~29kHz 에서 86~105kHz 사이)를 만들어 박쥐의 초음파를 방해할 뿐 아니라 주변 동료들에게 경고하는 역할도 같이 한다.
이후 이 연구를 진행하던 과학자들은 더 넓은 지역에서 박각시과 나방의 초음파 재밍을 연구했다. 최근 이들이 미국국립과학원회보(PNAS)에 발표한 내용에 따르면 초음파 재밍의 역사는 이전에 생각했던 것보다 아주 오래되었다고 한다.
연구의 리더인 이카토 카와하라 박사와 동료들은 32개국 70개 장소에서 700여 마리의 나방을 수집했으며, 총 124종의 박각시과 나방에서 절반에 가까운 57종이 초음파 재밍을 할 수 있다는 것이 이번에 확인되었다.
이는 이 곤충이 아주 오래전 초음파 재밍을 개발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많은 후손이 같은 특징을 가지고 있다면 모두 같은 공통 조상에서 물려받았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연구팀의 주장으로는 2600만년 전 올리고세 때 초음파 재밍이 처음 등장한 것으로 보인다고 한다.
나방이 초음파를 만드는 가장 흔한 방식은 인간의 관점에서 생각했을 때 다소 엽기적이지만 생식기를 이용하는 방법이다. 하지만 이번 연구에서는 울음판을 사용하는 다른 방식도 함께 발견되었다. 이는 초음파 재밍 기술이 한 번이 아니라 두 번 이상 독립적으로 진화되었을 가능성을 시사하는 것이다.
이 연구에 따르면 박쥐가 더 정교한 초음파 기술을 갖추면 나방 역시 더 정교한 재밍 기술을 발전시키는 방식의 진화적 '군비 경쟁'이 수천 만 년 동안 지속 된 셈이다. 나방 입장에서는 어떻게든 살아야 하므로 박쥐의 초음파를 피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목표가 된다. 그것이 이 작은 생물에게 초음파 재밍이라는 최첨단 기술을 개발하게 한 진화적 압력이었다.
최근 다른 연구에서는 박쥐가 다른 박쥐를 초음파로 재밍한다는 사실까지 밝혀진 바 있다. 박쥐와 나방, 그리고 박쥐와 박쥐의 생존 경쟁은 자연의 경쟁이 인간 사회만큼 치열하다는 증거일 것이다. 박쥐와 나방은 오늘도 어떻게든 살아남기 위해 치열한 경쟁을 벌이고 있다.
고든 정 통신원 jjy0501@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