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 문명의 바탕을 이루는 그리스 문명은 크레타 섬에서 태동했다. 미노아 문명, 또는 미노스 문명으로 알려진 그리스 최초의 청동기 문명은 기원전 2600년 즈음부터 등장해 오랜 세월 번영을 누렸으나 기원전 1400년을 전후로 크게 쇠퇴해 결국 자취를 감추게 된다.
그러나 그리스 본토에서 미노아 문명의 영향을 받은 미케네 문명이 등장해 고대 문명의 꽃을 피우게 된다. 비록 미케네 문명도 기원전 1100년 즈음 갑자기 붕괴하고 그리스 문명도 잠시 암흑기에 들어서지만, 이들의 유산이 서구 문명의 기초가 되었다는 사실은 부인하기 어렵다.
따라서 이들의 기원은 서구 역사가들에게 매우 큰 관심사 가운데 하나였다.
오랜 세월 미노아인의 기원은 미스터리였고 미케네인에 대해서는 북부 산지에서 남하한 아카이아인이라는 가설이 있었다. 즉, 그리스 문명의 기초를 이룬 민족과 다른 이민족이 그리스 본토에서 문명을 이룩했다는 이야기다. 하지만 이를 입증할 구체적인 증거는 없었다.
최근 워싱턴 대학, 하버드 의대, 막스 플랑크 연구소의 다국적 연구팀은 현대 터키 및 그리스인의 유전 정보와 미케네 및 미노아인의 유골 19구에서 발견한 DNA를 분석해서 고대 그리스 문명을 이룬 사람들의 기원에 대한 결정적인 증거를 발견해 저널 네이처에 발표했다.
이들이 조사한 DNA 정보를 종합하면 고대 그리스인의 유전 정보는 현대 그리스인과 유사하며 미노아인과 미케네인은 매우 유사했다. 다시 말해 이들은 같은 기원을 가진 민족이다. 그리고 이들의 그리스 북쪽이 아니라 동쪽에 살았던 고대 아나톨리아(터키)에서 살았던 신석기 농부의 후손일 가능성이 가장 높은 것으로 드러났다.
이 연구 결과는 고대 미노아인과 미케네인, 그리고 그 후손인 현대 그리스인이 모두 유럽인의 3대 기원 지역 중 하나인 고대 북부 유라시아(Ancient North Eurasian)에서 기원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연구팀은 이번 연구 결과가 모든 의문을 해소하지는 못했지만, 한 가지 중요한 논쟁을 해결했다고 평가했다. 그것은 미케네인이 멀리서 온 이민족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들은 미노아인과 유전적으로 큰 차이가 없는 비슷한 민족으로 같은 뿌리에서 나왔기 때문에 가까운 곳에서 비슷한 문명을 세운 것으로 보인다. 동시에 현대 그리스인이 미케네인이나 미노아인과 인종적으로 다른 것이 아니라 이들의 후손이라는 점을 입증했다. 사실 생각해보면 가장 간단하고 가능성 높은 가설인데 오히려 주목을 받지 못했던 셈이다.
물론 고대 그리스 문명에 대해서는 아직도 모르는 것이 많다. 이번에 밝혀진 내용은 중대한 논쟁을 해결했지만, 이들 문명이 왜 붕괴되었는지, 그리고 미케네 문명의 건설에 미노아인이 어떻게 관여했는지 등 남겨진 질문이 수두룩하다.
하지만 이제 과학자와 고고학자들은 고대인의 DNA 분석이라는 새로운 도구를 이용해서 과거 해결할 수 없었던 미스터리를 하나씩 풀어나가고 있다. 첨단 과학기술이 역사의 비밀을 풀어나가는 열쇠가 되는 것이다.
고든 정 칼럼니스트 jjy0501@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