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기자의 콕 찍어주는 그곳

[윤기자의 콕 찍어주는 그곳] 짐은, 살고자 하니 그리 알라…남한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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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눈 쌓인 남한산성의 성곽. 깎아지른 절벽 위에 축성한 남한산성은 천혜의 요새였다.


“신은 가벼운 죽음으로 무거운 삶을 지탱하려 하옵니다.”

“죽음으로써 삶을 지탱하지는 못할 것이옵니다.”(소설 ‘남한산성’)

소설 ‘남한산성’을 쓴 김훈 작가는 100쇄 특별판에서 김대중 전 대통령과 가진 일화를 소개하고 있다. 우연히 기차 안에서 만난 작가에게 김 전 대통령은 ‘김상헌과 최명길 중 어느 편인가’를 물었다. 김훈 작가는 ‘아무 편도 아니다’라고 답한다.

이에 김 전 대통령은 ‘나는 최명길을 긍정하오. 이건 김상헌을 부정한다는 말은 아니오’라고 말했다고 작가는 전한다. 수많은 민주 항쟁의 고초를 겪은, 평생을 이념적 지향과 현실적 실체의 갈등 속에서 삶의 방향을 찾았던 김 전 대통령의 답변은 지금도 유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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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한산성에서 가장 많은 왕래가 이루어졌던 남문. 이 문을 통하여 인조는 남한산성으로 들어왔다.


역사는 반복되고 있는가. 1636년 12월 14일부터 1637년 1월 30일까지 병자호란(1636∼1637) 초입 47일 동안이었다. 인조(1595∼1649)가 머문 남한산성은 신하들의 말(言)로써 높이를 더해 가고 있었다.

죽음을 통해 삶을 지탱하려 한 예조판서 김상헌(1570∼1652)과 감당할 수 있는 치욕을 통해 훗날을 도모하고자 한 이조판서 최명길(1586∼1647)의 목소리는 아마도 늘상 울음기가 가득했을 것이다. 우리 역사의 아픈 상처를 다시금 되짚는다. 경기도 광주(廣州)에 있는 남한산성으로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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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한산성의 입구에 있는 세계유산 남한산성 표지석. 남한산성은 2014년 6월 22일에 세계유산으로 지정되었다.


1636년 12월 6일 청나라의 태종은 조선과 군신관계를 맺고자 하였다. 이에 용골대를 선봉으로 한 10만 대군은 압록강을 건너 바로 한성을 공격한다. 이에 인조는 급히 강화도로 처소를 옮기고자 하였으나 이미 한양 부근의 양화진과 개화진에 청군은 12월 14일에 도착한 상태였다. 다시금 남한산성으로 급히 어가(御駕)를 돌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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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병자호란 당시 인조가 직접 올라 청나라 군사와 대적하여 군사들을 지휘한 곳이다. 남한산성에서 가장 전망이 좋은 곳 중의 하나다.


남한산성은 해발 500m이상의 험준한 산악 지형을 따라 쌓은 둘레 11.76㎞의 성곽이다. 북한산성과 함께 한양을 남북으로 지키는 산성으로 원래는 신라 문무왕(文武王) 때 쌓은 주장성(晝長城)의 옛터 위에 1624년(인조 2년)에 축성(築城)한 것이다.

남한산성 성벽에는 성가퀴라고 불리는 작은 독립 담장이 1700첩(堞)이 있었고, 공식적인 출입구인 성문은 총 4문(門)이 있다. 또한 성안팎을 오가는 작은 비밀통로인 암문(暗門)이 총 8개가 있었다.

막상 인조의 어가(御駕)가 산성에 올랐을 때 성내에는 미곡 1만 4300여 석, 잡곡이 9500석, 장독이 220여 개가 있었으니 비축한 양식은 넉넉한 듯하였다. 하지만 총융청, 훈련도감 소속의 군인과 진관 소속의 남한산성 내의 군병들만 하여도 총 1만 3800여명이 넘다보니 불과 보름도 제대로 버티지 못할 상태였다. 이미 전세(戰勢)는 일찌감치 청군에게 기운 상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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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한산성 곳곳에 숨겨져 있는 비밀 통로인 암문. 적군의 눈을 피해 이 문으로 군사들이 이동을 하였다.


결국 1637년(인조 15) 1월 30일, 인조는 곤룡포 대신 평민이 입는 남색 옷을 입고 소현세자와 더불어 남한산성의 서문을 걸어서 나선다.

현재의 잠실나루 근처의 삼전도(三田渡) 수항단(受降壇)에서 청태종에게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는 이른바 삼배구고두례(三拜九敲頭禮)라는 항복 예식을 행한다. 1637(인조 15) 2월 8일, 소현세자는 청의 인질이 되어 봉림대군 등과 함께 한양을 출발해 심양으로 향한다.

다산 정약용이 남긴 ‘비어고(備禦考)’에 이 당시의 상황이 상세히 남겨져 있다. 전란 이후 청에 끌려간 포로는 60만 명이 넘으며, 그 중 부녀자들의 수는 셀 수가 없을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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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병자호란 당시 인조가 겪은 시련과 8년간 볼모로 잡혔던 효종의 원한을 잊지 말자는 뜻에서 영조가 이름지은 무망루다.


당시 인질 1인당 몸값은 원래 은(銀) 30냥 내외였으나, 일부 사대부 집안의 경우 자신의 가족들을 먼저 구하기 위해 웃돈을 청군에게 얹어주다보니 실제 인질의 몸값은 200냥 가깝게 폭등하였다.

따라서 여염집 출신 포로는 아예 구명(求命)을 포기하는 것이 다반사였다. 그러나 사대부들의 상황은 달랐다. 영의정 김류는 첩의 딸 한 명을 구하기 위해 용골대에게 은(銀) 1000냥을 불렀다. 일반 백성 50명을 살릴 돈이었다.


병자년 그 해 겨울, 남한산성에서 일어난 고통의 역사는 말로써 머리를 채우려한 사대부들이 아닌 볼모가 된 백성들만이 오롯이 감당해야 했다. 역사는 되풀이된다.



<남한산성에 대한 여행 10문답>

1. 꼭 가봐야 할 정도로 중요한 여행지야?

-훌륭한 산행코스다. 성남에 가 볼 일이 있다면 천천히 돌아볼만한 곳이다.

2. 누구와 함께?

-가족과 함께. 혼자로도 좋다.

3. 가는 방법은?

-지하철 8호선 산성역 2번 출구에서 내려 9번, 52번 버스를 타고 산성로타리에서 하차.

4. 눈여겨 볼만한 것은?

-수어장대, 행궁, 암문, 4대문 등 볼만한 곳이 많다.

5. 명성과 내실 관계는?

-수도권 지역의 대표적인 산행 코스여서 주말에는 인파가 많다.

6. 꼭 봐야할 장소는?

-수어장대, 행궁, 침괘정, 연무관

7. 먹거리 추천?

-닭볶음탕 ‘산성오복식당’(743-6566), 닭죽 ‘논골장마당집’(745-5700), 붕어찜 ‘고향매운탕’(767-9693), 비빔밥 ‘남문관’(743-6560) / 지역번호 031

8. 홈페이지 주소는?

-http://www.gg.go.kr/namhansansung-2

9. 주변에 더 볼거리는?

-경기도자박물관, 경안천습지생태공원, 한국잡월드

10. 총평 및 당부사항

-병자호란에 대한 역사적 지식을 가지고 있다면 아주 훌륭한 역사 탐방의 기회가 될 듯. 눈 내린 겨울의 남한산성을 추천.

글·사진 윤경민 여행전문 프리랜서기자 vieniame2017@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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