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거의 회생불능처럼 보였던 AMD는 2017년 라이젠 프로세서로 화려하게 부활에 성공했습니다. 젠(Zen) 아키텍처 기반의 라이젠은 인텔 코어 프로세서보다 더 작은 코어를 사용하고 여러 개의 다이를 하나의 CPU에 넣는 방식으로 코어 개수를 크게 늘려 인텔을 압박했습니다. 인텔에는 설상가상으로 3세대 제품부터는 인텔의 14㎚ ++보다 크게 앞선 TSMC의 7㎚ 공정으로 제품을 생산해 코어 숫자와 성능 모두 대폭 개선했습니다. 이제는 AMD가 인텔을 추격하는 게 아니라 인텔이 AMD를 추격해야 하는 상황까지 온 것입니다.
인텔은 올해 10㎚ 공정을 도입하고 기존의 아키텍처를 개선한 서니 코브 아키텍처를 개발에 대응에 나섰습니다. 하지만 아직 10㎚ 공정 반도체 생산량이 충분치 않은 상황이라 내년 상반기까지 14㎚++ 공정에 기댈 수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새 공정을 적용한 신제품을 대거 투입할 수 없다면 인텔이 내세울 수 있는 유일한 반격의 카드는 가격 인하입니다. 그리고 인텔은 고성능 데스크톱 CPU인 캐스케이드 레이크-X(Cascade Lake-X)를 내놓으면서 가격을 대폭 인하했습니다. 그것도 10-20% 낮추는 게 아니라 최대 절반을 낮췄습니다.
18코어 36스레드 최상위 제품인 Core i9-10980XE은 공식가격 979달러로 전 세대인 스카이레이크-X Core i9-9980XE의 1979달러보다 50% 저렴합니다. 14코어 28스레드 제품인 Core i9-10940X 역시 전 세대 제품보다 600달러 저렴한 784달러로 가격을 낮췄습니다. 12코어 24스레드인 Core i9-10920X는 500달러 낮춘 689달러, 10코어 20스레드인 Core i9-10900X는 399달러 낮춘 590달러가 됐습니다.
인텔이 공개한 슬라이드에서는 이와 같은 공격적 가격 인하로 경쟁 상대인 2세대 스레드리퍼 대비 가격 대 성능비가 더 커졌지만, (사진) 사실 이번 가격 인하는 스레드리퍼보다 가성비가 우수한 라이젠 12/16코어 제품에 대응하기 위한 것으로 풀이됩니다. 12코어 24스레드인 라이젠9 3900X는 499달러로 이미 시장에 출시됐고, 16코어 32스레드인 라이젠9 3950X는 749달러로 올해 11월 출시 예정입니다. 라이젠이 12~16코어까지 제품 라인업을 늘리면서 10코어 이상 CPU 가격을 대폭 낮췄기 때문에 가격을 낮추지 않으면 경쟁 자체가 불가능한 상황이었습니다. 가격을 절반으로 낮춘 덕에 캐스케이드 레이크 – X는 스카이레이크 – X 대비 가성비가 두 배 정도 좋아졌습니다.
다만 이런 공격적인 가격 인하가 통할지는 미지수입니다. 캐스케이드 레이크 – X가 속한 HEDT (high-end desktop) 제품군은 CPU 이외에 부대 비용이 상당하기 때문입니다. 고가의 X299 메인보드, 4채널 DDR4 메모리, 높은 발열량을 감당할 수 있는 고성능 공랭 혹은 수랭식 쿨러, 그리고 이 시스템을 감당할 고용량 파워서플라이까지 포함하면 시스템 구축 비용은 메인스트림 제품군인 12/16코어 라이젠보다 상당히 올라갈 수밖에 없습니다. 14㎚++ 공정 제품이라 7㎚ 공정의 3세대 라이젠 대비 전력 소모가 높아 사용 시간이 긴 사용자의 경우 전기 사용료도 만만치 않을 것입니다.
결국 제대로 된 반격은 인텔이 차세대 미세 공정 기반 CPU를 투입할 수 있는 내년 이후가 되겠지만, 캐스케이드 레이크 – X의 가격은 많은 것을 생각하게 만듭니다. 불과 2년 전인 2017년에 등장한 10코어 20스레드 Core i9-7900X의 출시 가격은 999달러였습니다. 하지만 이제 이보다 약간 저렴한 가격에 18코어 36스레드 CPU인 Core i9-10980XE를 살 수 있게 됐습니다. 지난 몇 년간 고성능 CPU 시장에서 치열한 경쟁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입니다. 인텔 vs AMD의 CPU 전쟁에서 가장 이득을 보게 되는 것은 인텔이나 AMD가 아니라 소비자라는 것을 다시 확인시켜주는 사례입니다.
사진=인텔
고든 정 칼럼니스트 jjy0501@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