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10월 5일, 맨해튼 34번가역 열차 안에서 소동이 일었다. 한 흑인 남성 승객이 애꿎은 한국계 여성 승객에게 시비를 건 것이다.
모두 마스크를 착용한 가운데 혼자만 마스크를 쓰지 않은 흑인 남성은 한국계 여성을 성희롱하고 인종차별적 폭언을 퍼부었다. 피해 여성이 촬영한 영상에서는 흥분한 남성이 좌석에서 일어나 음란 행위와 함께 갖은 욕을 내뱉는 모습이 확인됐다.
피해 여성이 “그만하라. 공공장소다. 열차 안 모든 승객이 당신을 보고 있다. 예의를 갖추라”고 제지했지만 남성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오히려 여성에게 더 가까이 다가가 음란한 자세를 취하며 계속 난동을 부렸다. 위협을 느낀 여성이 “다가오지 말라. 만지지 말라”고 경고하자 남성은 “X먹어라 보균자”, “누가 널 만지고 싶어 하겠느냐. 하찮은 보균자”라고 여성을 비하했다. 심지어 여성을 향해 침까지 뱉었다.
당시 열차에 있던 여러 승객은 상황을 지켜보다 열차가 다음 역 승강장에 도착하자 바삐 자리를 떴다.
피해 여성이 촬영한 영상에 전후 사정이 다 담기진 않았으나 해당 영상만으로도 사건은 충분히 혐오범죄라 할 만했다. 하지만 경찰은 뜻밖의 해석을 내놨다.
현지언론은 고소를 접수한 뉴욕시경이 초기 수사 단계에서 사건을 단순 일반 사건으로 분류했다고 전했다. 보도에 따르면 경찰은 가해 남성의 “보균자” 발언도 수사 보고서에서 누락시켰다. 가해자가 ‘보균자’라는 표현을 쓴 게 인종차별적 동기에서 비롯된 것은 아니라는 판단에서였다.
피해 여성 이모씨는 “분명 고소장에 가해자의 ‘보균자’ 발언을 적었는데, 수사 보고서에서는 빠졌다. 경찰은 가해자가 나를 ‘아시아계 보균자’라고 부르지 않고 그냥 ‘보균자’라고 불렀기 때문에 이번 사건이 혐오범죄는 아니라더라. 깜짝 놀랐다”며 황당해했다. 경찰은 또 피해 여성이 현장을 촬영한 게 오히려 가해자를 자극했다고 지적한 것으로 알려졌다.
다행히 경찰은 이후 민간인으로 구성된 현지 혐오범죄심사위원회 권고에 따라 해당 사건을 단순 일반 사건에서 혐오범죄로 전환해 수사를 계속하고 있다. 현지 아시아계 공동체에서는 혐오범죄에 대한 보다 강도 높은 대응을 주문하는 한편, 사건과 관련된 모든 증거는 빠짐없이 경찰 보고서에 포함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권윤희 기자 heeya@seoul.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