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능을 크게 좌우하는 만큼, 컴퓨터를 살 때는 항상 CPU가 중요한 기준이 됩니다. 손 안의 컴퓨터라는 스마트폰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흔히 애플리케이션 프로세서(AP)라고 불리는 스마트폰 프로세서는 CPU는 물론 그래픽 장치, 각종 컨트롤러를 비롯한 장치를 하나의 프로세서 안에 담기 때문에 사실 CPU보다 훨씬 중요합니다. 한번 구매하면 교체는 불가능하니까요.
그런데 스마트폰에 들어가는 CPU는 과연 어떤 것인지 궁금하진 않으신가요? 스마트폰에 조금 관심 있는 분이라면 ARM이나 Cortex Axx 같은 표현을 흔히 접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 명칭이 스마트폰에 탑재되는 CPU의 종류라는 것은 잘 알고 계실 것입니다. 하지만 ARM이 무슨 뜻인지를 물어보면 선뜻 답하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결론부터 말하면 본래 이 단어는 'Acorn RISC Machine'의 약자입니다.
- 영국에서 건너온 신사의 CPU
개인용 컴퓨터가 태동하던 1970~80년대, 지금은 그 이름을 기억하는 사람이 별로 없지만, 영국에는 아콘 컴퓨터(Acorn Computers)라는 회사가 있었습니다. 영국의 애플이라고 불리기도 했던 회사로 자체적으로 개발한 CPU를 탑재한 영국 토종 컴퓨터회사였습니다.
1980년대, IBM이 인텔 CPU와 마이크로소프트의 DOS를 이용한 호환 PC의 제조를 허용하자 이를 사용한 PC들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IBM 호환 PC는 다른 형태의 개인용 컴퓨터 제조업체들에는 큰 위협이었습니다. 아콘 컴퓨터 역시 이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 작고 강한 RISC 프로세서를 내놓기로 합니다.
이들이 1987년 내놓은 아콘 아르키메데스는 ARM2 프로세를 탑재한 컴퓨터로 비교적 저렴한 가격을 무기로 내세웠습니다. 저렴한 가격의 비결은 작은 ARM 프로세서로 이 CPU는 3만 개에 불과한 트랜지스터를 집적한 32비트 프로세서였습니다. 참고로 인텔의 80386이 27만5천 개의 트랜지스터를 집적한 점을 생각하면 정말 작은 32비트 프로세서였던 것이죠.
그러나 성능상의 격차는 존재했습니다. 1990년대가 되자 인텔과 마이크로소프트의 연합은 매우 강력해져 한때 잘나가던 미국의 애플 컴퓨터도 흔들렸고, 영국의 애플이라던 아콘은 문을 닫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세상에는 작고 저렴한 CPU를 원하는 수요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ARM 부분만 회사를 분리해 1990년 ARM이라는 회사가 설립되었습니다. ARM의 의미도 Advanced RISC Machines Ltd로 바뀌게 되죠.
이 작은 회사는 인텔처럼 CPU를 직접 생산할 여력이 없었습니다. 대신 자신들이 설계한 CPU의 라이선스를 필요한 회사에 빌려주고 돈을 받는 라이선스 영업을 시작했습니다. 결국, 그것이 이 ARM이 거의 모든 모바일 기기에 사용되게 된 이유입니다. 발상의 전환을 통해 망해가던 회사를 미래의 주역으로 바꾼 것이죠.
- 모바일 시장의 강자가 되다.
인텔 x86 CPU는 매우 강력하기는 했지만, 전력 소모가 많은 데다 가격이 비쌌기 때문에 모바일 기기에 넣기는 적합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PDA같이 휴대용 컴퓨터에 대한 수요는 분명 존재했습니다. 초창기 PDA와 스마트폰은 ARM의 CPU를 사용했는데, 여기에서 이외의 역사 가운데 하나가 바로 인텔이 이 시장에 뛰어들었다는 것입니다.
인텔은 본래 ARM과 DEC가 개발하던 스트롱암 프로세서를 인수했습니다. 과거 앙숙관계였던 인텔과 ARM은 서로 협력해서 이를 더 발전시켜 나가게 되는데 엑스스케일(XScale) 프로세서가 그것입니다.
5세대 ARM 아키텍처를 사용한 엑스스케일 프로세서는 2000년대 초반 PDA나 스마트폰은 물론 내비게이션 등에도 많이 탑재되었습니다. 당시 ARM 계통 프로세서 가운데 가장 강력했을 뿐 아니라 가장 좋은 성능을 지녔던 모바일 프로세서였죠. 그러나 잘나가던 인텔 표 ARM 프로세서는 2006년 인텔이 이 부분을 마벨에 매각하면서 끝나게 됩니다.
훗날 이 결정을 두고 인텔의 가장 큰 실수였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지만, 당시 인텔은 나름의 계획이 있었을 것입니다. 즉, 자신들이 개발하던 x86 계열 CPU인 아톰 프로세서로 이를 대신하려 했던 것입니다. 문제는 ARM 계열 프로세서들이 빠른 속도로 발전해 스마트폰 시대를 열면서 인텔 뜻대로 세상일이 풀리지 않았다는 것이죠.
인텔이 이 부분을 매각한 후 애플의 아이폰이나 삼성의 갤럭시 모두 ARM 기반 CPU를 탑재한 스마트폰을 내놓았고 이는 금방 날개라도 달린 듯 팔려나가게 됩니다. 재미있는 것은 인텔에서 ARM 부분을 사들인 마벨이 이 시대의 주역이 된 것이 아니라 퀄컴이나 삼성처럼 다른 회사가 빠른 속도로 시장을 장악했다는 것입니다.
이들은 새로운 ARMv7-A 아키텍처를 기반으로 한 고성능 프로세서를 내놓았고 곧 스마트폰 시대의 주역이 됩니다. 인텔은 뒤늦게 아톰 기반의 프로세서를 내놓았지만, 시장의 흐름을 바꾸기에는 역부족이었습니다. 적어도 스마트폰 시장에서 인텔의 영향력은 아직 제한적입니다.
- 고성능 스마트폰 시대를 열다.
과거 ARM 기반 프로세서들은 매우 작고 저전력이었습니다. 물론 저성능이라는 대가가 있었지만, 단순한 기능만 처리했기 때문에 큰 문제는 없었습니다. 하지만 스마트폰 시대가 되면서 이 모든 것이 바뀌게 됩니다.
주요 스마트폰 제조사들은 그전처럼 전기는 적게 먹으면서 아주 강력한 프로세서를 원하게 됩니다. 그래서 등장한 ARMv8-A 계열의 Cortex-A53, Cortex-A57 코어는 상당히 크고 강력한 프로세서입니다. 특히 64비트를 지원하기 때문에 메모리를 4GB 이상 쓸 수 있다는 장점이 있습니다.
삼성전자의 최신 엑시노스 프로세서는 Cortex-A53/57 코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덕분에 아주 강력한 성능을 자랑하죠. 애플은 ARMv8 기반의 자체 프로세서를 사용하는데, 코어 수는 작아도 역시 강력합니다. 이런 강력한 모바일 프로세서는 스마트 기기 시대의 주역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최근에는 ARM 기반 프로세서가 서버 등 과거 같으면 상상하기 어려운 영역까지 침투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잘 몰라서 그렇지 사실 스마트폰 말고도 ARM 기반 프로세서들이 들어간 우리 주변의 IT 및 가전 기기는 셀 수 없을 만큼 많습니다.
2014년 ARM 코어가 탑재된 프로세서의 수는 120억 개에 달했다고 합니다. 오래전 아콘 컴퓨터가 파산하고 ARM만 살아남았을 때는 정말 예측하기 어려운 일이 지금 일어나고 있는 셈입니다.
이런 걸 보면 끝나기 전까지는 끝난 게 아니라는 말이 옳은 것 같습니다. 완전히 포기하기 전까지 재기를 위한 기회는 언젠가 있을 것입니다. IT 역사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랄까요.
고든 정 통신원 jjy0501@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