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우 씨는 중국 유력매체 훙싱신원과의 인터뷰를 통해 “평소 글을 쓰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나를)만나는 사람들은 모두 루쉰의 자손이 어떻게 글쓰는 것을 선호하지 않느냐고 의아해했다”면서 “이런 분위기 속에서 살아야하는 것은 큰 두려움과 스트레스를 평생 안고 산다는 것을 의미했다”며 유명인 자손들이 겪는 상황을 설명했다.
지난 1953년 출생한 저우 씨는 루쉰의 두 번째 아내인 쉬광핑과의 사이에서 출생한 자손이다. 저우링페이 씨의 조모 쉬광핑은 루쉰 선생의 제자이자 비서로 알려진 여성이었다. 저우링페이 씨의 ‘링페이’는 할아버지 루쉰의 필명을 그대로 사용한 이름이다. 실제로 루쉰 선생은 ‘허난’이라는 월간지를 출간할 당시 자신의 필명을 ‘링페이’로 사용한 기록이 남아있다. 그 후 ‘날아간다’는 의미를 담은 이 필명은 루쉰 선생이 불혹의 나이에 얻은 장남과 그의 장손에게 그대로 전달했다.
자신의 이름을 가리켜 저우링페이 씨는 “이름에서부터 할아버지의 후광 아래에서 살아야 했다”고 토로했다. 현재 루쉰문화재단 회장이자 중국루쉰문화기금회 비서장으로 재직, 매년 루쉰 문학상 개최와 외부 강연 등을 이어가고 있는 저우링페이 씨는 올해에는 조부의 탄생 140주년을 기념해 매주 평균 5~6회 이상의 외부 활동을 이어가는 바쁜 생활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저우 씨는 “태어난 이후 어디를 가도 사람들은 (나를)루쉰의 자손으로 지켜본다는 사실은 가끔 곤혹스러울 때가 많았다”면서 “어떤 사람은 루쉰 작가가 평소 담배를 즐겨 피웠다는 점을 들어서 담배를 즐기지 않는 (나의)취향까지 의아해했을 정도다. 유명인 자손의 삶은 분명히 양면성을 가지고 있다”고 했다.
그가 가장 곤혹스러웠던 것은 루쉰의 문학적 재능을 자신이 물려받지 못했다는 것을 받아들이기까지의 시간이었다. 저우 씨는 “어려서부터 문학에 관심이 없었다”면서 “문학 대신 물리학이 같은 과학 분야를 선호했다. 어릴 때부터 문학 책 대신 장난감 자동차나 기차 같은 것들을 조립하는 것을 더 좋아했다”고 했다.
저우 씨는 사실 조부 루쉰을 한 번도 마주한 적이 없다. 저우 씨가 출생한 당시 조부 루쉰은 이미 사망한 이후였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저우 씨는 “할아버지를 한 번도 만난 적은 없다”면서 “초등학교 5학년 무렵 교과서에서 할아버지의 작품이 등장했다. 담임 선생님은 곧장 나를 지목하면서 루쉰의 손자라면 남들보다 더 글을 잘 써야 한다고 말씀하셨던 기억이 여전히 선명하다”고 했다.
그러면서 “당시 처음으로 무거운 부담감을 느꼈다”면서 “수많은 눈들이 나를 지켜보고 있는 것 같았고, 당시의 부담은 내가 사는 동안 평생 나를 짓누를 것이라는 것을 예감할 수 있었다”고 회상했다.
저우 씨는 이런 환경에서 벗어나기 위해 그가 16세가 되던 해 군입대를 선택했다. 하지만 군입대 당일부터 루쉰의 장손이라는 그의 신분은 그를 또 다시 억압했다. 저우 씨는 “군 입대 당일 기차를 타고 이동했다”면서 “중대장이 처음 만난 날 나를 불러서 루쉰의 손자냐고 물었고, 글을 잘 쓸 것이 분명하니 통신병으로 배치하겠다고 말했다. 나는 책도 안 읽고 글도 안 쓴다고 했지만 중대장이 나를 의아하게 쳐다봤다”고 기억했다.
그는 유명인의 자손으로 사는 삶과 관련해 “루쉰 선생과 그가 남기 유산은 소수의 자손들의 것이 아니다”면서 “우리 모두의 것이다. 나와 내 가족들은 다만 우리 모두를 위해 남겨진 것들을 돌봐가면서 전승하는 임무를 가졌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임지연 베이징(중국) 통신원 cci2006@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