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9일, 알렉산드르 소콜로프 키로프주 주지사 권한대행과의 화상 회의에서 푸틴 대통령은 알코올중독 문제를 거론했다. 푸틴 대통령은 소콜로프 권한대행에게 “지금은 뭘 감출 때가 아니다”라면서 알코올중독 문제에 관심을 기울이기를 촉구한다고 밝혔다.
일주일 후, 알렉산드르 아브데예프 블라디미르주 주지사 권한대행과의 화상회의에서도 푸틴 대통령은 알코올중독 문제를 언급했다. 푸틴 대통령은 “건강 캠페인을 시작할 필요가 있다. 남성의 음주 문제가 날로 심각해지고 있다”며 건강 문제에 관한 선전전과 인프라 개발을 주문했다.
메두사는 푸틴 대통령이 알코올중독 문제를 이렇게 자주 언급한 적이 없었다고 전했다. 2016년 시베리아 주민 77명이 변성 알코올이 가미된 입욕제를 마시고 사망했을 당시 알코올중독 얘기를 꺼낸 것조차 이례적인 일이었다고 설명했다. 게다가 푸틴 대통령이 지목한 키로프주와 블라디미르주 모두 알코올중독률이 특별히 높은 지역이 아니라고 메두사는 덧붙였다.
이어 러시아 보건부가 모든 지역의 통계를 발표하는 건 아니지만, 러시아에서 알코올중독률이 가장 높은 곳은 극동 지역과 중부 펜자 지역으로 알려졌다고 부연했다. 이 때문에 푸틴 대통령이 알코올중독 문제를 거듭 지적했을 때 소콜로프와 아브데예프 권한대행 둘 다 어리둥절해한 것이라고 메두사는 설명했다.
그렇다면 푸틴 대통령은 왜 갑자기 알코올중독 문제에 관심을 두게 된 걸까. 크렘린궁 내부 소식통은 메두사와의 인터뷰에서 관리들의 과음 문제가 불거졌기 때문이라고 귀띔했다.
“전쟁 후 극심한 스트레스, 과음으로 풀어” 기강해이?
소식통은 “우크라이나 전쟁 후 러시아 관리들이 과음을 일삼기 시작했다. 크렘린궁 내부 인사들은 물론이고 장관과 부총리, 대통령 행정안전위원회 위원들, 국영기업 사장들, 주지사들까지도 술을 퍼마신다”고 밝혔다.
소식통은 “2월 24일 이전에 우크라이나 전면 침공 계획을 아는 러시아 관리는 거의 없었고, 개전 후 많은 관리가 몇 달을 충격과 혼란 속에 보냈다. 전쟁에 따른 서방의 제재와 그로 인한 피해 때문에 스트레스에 시달렸다. 그리고 그 스트레스를 술로 풀었다”고 설명했다.
이어 “일부 관리는 술을 마시느라 중요한 행사를 놓치기 일쑤였고, 공식적인 회의에서 말이 안 되는 소리를 늘어놓거나 말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이미 일반 국민도 눈치 챘을 정도”라고 했다.
그러면서 “이 문제로 푸틴 대통령이 골머리를 앓았다. 그가 최근 알코올중독 문제에 특별한 관심을 기울이게 된 이유”라고 전했다. 사실이라면 크렘린궁 내부의 기강해이가 의심되는 상황이다.
보도에 따르면 푸틴 대통령은 일단 개선의 여지를 저울질하고 있다. 현재로선 과음 문제로 관리들을 무작정 내치기보다 ‘바뀌어야 한다’는 암시를 계속하는 것이 현명하다는 판단에서다. 물론 푸틴 대통령의 인내심이 언제 바닥을 칠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다. 크렘린궁 소식통은 “관리들의 행동이 개선되지 않으면 상황은 언제든 바뀔 수 있다”며 우려를 표했다.
그러나 드미트리 페스코프 크렘린궁 대변인은 “푸틴 대통령이 알코올중독 문제를 거론한 것은 키로프주와 블라디미르주가 알코올 섭취 감소라는 전반적인 추세와 다른 경향을 보이는 ‘예외 지역’이기 때문”이라며 확대 해석을 경계했다.
러시아 기강해이·내부분열 의혹 잇따라
하지만 과음 문제 외에도 러시아의 기강해이와 내부분열에 관한 의혹은 끊임없이 제기되고 있다. 영국 국방부는 특히 러시아군이 병사들의 사기저하와 기강해이에 주목했다. 이달 초 영국 국방부는 전쟁의 장기화에 따른 전투 피로 누적, 대규모 사상자 발생, 전투 상여금 미지급 등으로 러시아군의 기강이 해이해졌다고 분석했다. 이 때문에 명령 불복종과 자국군 장비 파괴 같은 현상이 이어지고 있다고 주장했다.
크렘린궁 안팎에서는 슬슬 국가 리더십에 대한 비판도 나오는 모양이다. 로이터 통신 등은 우크라이나의 대대적 반격으로 전세가 급반전되면서 러시아에서 여론 분열 양상이 감지됐다고 지적했다. 평화 협상을 준비하자는 의견과, 전열을 재정비해 공세를 다시 강화해야 한다는 의견이 엇갈리는 가운데 핵전쟁도 불사해야 한다는 과격론까지 등장했다는 것이다. 또 람잔 카디로프 체첸 자치공화국 정부 수장이 최근 전황에 대해 “실수가 분명하다”고 말하는 등 푸틴 대통령의 지지층에서조차 비판이 나오고 있다고 로이터 통신은 설명했다.
특히 전쟁의 최대 지지층이던 러시아 내 매파의 분노는 극에 달했다고 외신은 전했다. 러시아군이 우크라이나군의 공세에 밀려 하르키우주에서 철수를 결단한 10일, 뉴욕타임스는 러시아의 강경파 블로거들이 “지휘부를 징벌해야 한다”는 등의 불만을 쏟아냈다고 보도했다. 메두사 전쟁 해설자 드미트리 쿠즈네츠 역시 “매파 대다수가 충격받은 상태다. 이런 일이 일어나리라고 생각지도 못했다”며 “그들 대부분이 진심으로 화났다고 본다”고 평가했다.
그러나 드미트리 페스코프 크렘린궁 대변인은 이 문제 역시 대수롭지 않다는 듯 넘겼다. 페스코프 대변인은 13일 외신의 관련 질문에 “다원성의 사례”라며 “전체 러시아인들은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을 계속해서 지지한다”고 주장했다. 또 “러시아인들은 국가수반의 결정을 중심으로 통합돼 있다”고 덧붙였다.
권윤희 기자 heeya@seoul.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