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하드코어 맛기행⑥] 소주보다 쓴 현실 달래는 ‘제주의 맛’

작성 2009.05.18 00:00 ㅣ 수정 2009.05.18 1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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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슬포항에 위치한 덕승식당의 쥐치조림과 아나고탕이여영 기자


쓰린 속을 부여 쥐며 깬 이튿날 아침. 해장거리도 제주다워야 한다. 포구에서 생선 조림과 국은 어떨까? 미리 주워들은 식당들 가운데 중문에서 그다지 멀지 않은 모슬포를 택하기로 한다. 모슬포 포구의 식당들은 자신들의 배에서 갓 잡은 생선들로 각종 요리를 만들어 내오는 것으로 유명하다. 물론 이번 미각 기행 대상이 모두 그렇듯, 깔끔한 외관과 맛을 기대해서는 안 된다.



유구한 전통의 맛이 목표다. 동네 식당 주변을 서성이다 들어선 곳이 덕승식당이다. 억척스러운 주방의 아주머니가 강권하다시피 해장 요리를 내온다. 쥐치 조림과 아나고탕(사진). 한 번도 경험한 적 없는 요리다. 쥐포로만 맛봤던 쥐치를 조림으로, 세코시 회로만 맛봤던 아나고를 탕으로 끓였다. 낯설고 기이한 맛에 싫은 내색만 안 했으면 하고 내심 바라면서 숟갈을 당겼다.

하지만 왠걸? 예상외의 맛이다. 쥐치의 담백한 살집에 은근히 스며든 간장과 고춧가루의 간이 조화롭고 변덕스럽다. 고급스러운 맛이다. 아나코탕의 국물 역시 간밤의 술기운을 가라앉힐 만큼 육중하고도 칼칼하다. 통으로 썰어 넣은 아나고도 날 것보다 덜 비리다. 해장을 위해 국물을 다 떠먹은 후 남긴 아나고 몸통 몇 개가 눈에 밟히는데, 역시 제주 아주머니가 뒤통수에 대고 싫지 않은 참견을 한 마디 한다. “무사, 아나고 다 먹엉 갑주게.(왜? 아나고 다 먹고 가지 않고?)”

이른 아침 후에 몇 걸음 뗀 포구의 정경이 삼삼해, 급히 미각 기행의 목적지를 바꾸기로 한다. 호텔에 들러 서둘러 체크아웃을 한 후 다시 모슬포로 돌아왔다. 모슬포에 돌아오고 나서도 배는 꺼지지가 않았다. 그래도 그렇게 간단한 음식으로 제주 미각 기행을 끝낼 수 없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혔다. 이 곳 어딘가에 현지인들이 인정할 만한 곳을 찾자.

물어물어 밀냉면과 고기국수 전문점(사진)이라는 산방식당을 찾았다. 밀면이라면 부산이 원조가 아니던가. 부산 출신인 내게는 라면만큼이나 익숙한 음식이다. 그런데 식당 내 안내판에는 고양에 2호점을 냈다는 안내와 함께, 43년 전에 제주에서 태생한 음식이라는 표현이 버젓이 적혀 있다.

처음에는 강한 부정의 유혹을 느꼈으나, 숙고해보니 그럴 듯도 하다. 밀면이라는 게 이북 사람들이 한국전쟁을 전후에 남부 지방에 뿌리내린 음식이다. 그렇다면 전후에 그들이 제주에서 만들어 먹지 말란 법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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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방식당의 밀면과 고기국수, 그리고 제주식 돼지고기 수육이여영 기자


원조를 따질 일이 아니었다. 더욱이 밀면과 고기 국수 역시 훌륭하다. 부산의 밀면과 돼지국수와 달리 더 깔끔하면서도 시원한 맛을 살렸다. 내친 김에 수육 한 접시. 제주의 수육은 돼지고기를 된장 국물에 푹 삶아내 껍질째 썬 것이다. 그 껍질에는 제주 돼지임을 입증하는 붉은 도장이 꽝 하고 찍혀 있어야 한다.

다시 서울로 올라오는 비행기 안에서야 배가 묵직한 줄을 알겠다. 24시간 동안 다섯끼를 내달렸으니. 한끼도 빼놓지 않고 소주를 곁들였으며, 마지막 한 수저까지 빼먹지 않았다.

게다가 이번 미각 기행은 모두 제주 전통 요리였다. 모두 제주산 ‘괴기’(고기에 해당하는 제주의 방언)가 주재료였다. 육고기이든 바닷고기이든. 그리고 제주의 미각은 좋은 의미로 ‘괴기’해서 좋다. 남 달라서 좋다는 말이다.


싱싱한 재료의 맛을 최대한 살리는 한편, 매운 맛을 빼고는 인공적이랄 맛을 첨가하지 않는다. 하긴 매운 것은 맛이 아니라 통증이라고 했으니, 인공의 맛이라고는 아예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제주의 재료에 제주인 특유의 인고(忍苦)를 마다하지 않는 전통 정도가 가미된 음식이라고 하겠다. 소주보다 쓴 현실을 다스리는 데 제주의 ‘괴기’ 요리 다섯끼라면 한 달은 족히 견디겠다. 지금으로선 그러고도 남겠다.

서울신문NTN 이여영 기자 yiyoyong@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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