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WS 리인베트 2019 (re:Invent 2019) 콘퍼런스에 공개된 여러 가지 신기술과 새로운 서비스 가운데서 그래비톤 2는 유독 눈길을 끌었습니다. 아마존이 인텔의 플래그쉽 제온 프로세서 기반 서버보다 가격 대 성능비가 더 좋다고 주장했기 때문입니다.
이 주장이 사실이라면 그렇지 않아도 AMD 에픽 (EPYC) 프로세서의 공세에 긴장하고 있는 인텔 제온 프로세서의 입자가 한결 더 위태로워질 수 있습니다.
본래 ARM은 1980년대 인텔의 맞섰던 영국의 아콘 컴퓨터에서 유래된 CPU 설계 회사입니다. 타고난 운명 자체가 인텔과 숙적이었던 셈입니다. ARM이 급격히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10여 년 전부터 시작된 스마트폰 혁명 덕분이었습니다.
애플, 삼성, 퀄컴이 서로 경쟁적으로 성능을 높이면서 ARM 역시 더 강력한 성능의 CPU 설계를 내놓았고 이제는 x86을 위협할 수 있는 수준까지 성능이 높아진 것입니다.
하지만 여전히 서버 영역은 ARM 기반 CPU가 넘보기 어려운 영역입니다. 여러 차례 시도가 있긴 했지만, 현재 서버 시장이 x86 기반으로 돌아가고 있는 데다 관련 생태계 역시 여기에 최적화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최근 서버 시장에 도전장을 내밀었던 퀄컴 Centriq 2400 프로세서 역시 고배를 마시고 시장 진입에 실패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아마존은 작년에 그래비톤 프로세서를 공개했습니다. AWS 그래비톤 CPU는 ARM이 설계한 서버용 아키텍처인 네오버스 (Neoverse) 기반으로 CPU 하나가 1-16개의 vCPU를 제공할 수 있다고 소개했습니다.
이 CPU는 아마존 EC2 A1 인스턴스 서버에 사용됐습니다. 사실 이때만 해도 아마존의 행보는 크게 주목받지는 않았습니다. 그래피톤은 16nm 공정으로 제조되며 트랜지스터 숫자는 50억 개 정도로 사실 최신 모바일 AP나 일반적인 데스크톱 CPU보다 더 복잡한 프로세서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성능이나 복잡도에서 인텔 제온이나 AMD 에픽 프로세서의 경쟁 상대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이번에 공개한 그래비톤 2는 AMD 에픽과 동일한 7nm 공정으로 제조될 뿐 아니라 트랜지스터 숫자도 300억 개로 에픽 7742 (64코어)의 320억 개에 견줄 만한 거대한 CPU입니다.
최대 64개의 vCPU를 제공하며 서버 당 512GB의 DDR4 3200 메모리, 64레인 PCIe 4.0 인터페이스를 제공해 x86 기반 서버와 경쟁할 수 있는 스펙을 갖췄습니다. 아마존은 그래비톤 2가 그래비톤에 비해 7배나 성능이 높다고 발표했습니다. 코어 숫자가 4배로 늘고 코어 한 개당 성능도 2배 가까이 늘었기 때문입니다.
아마존은 인텔 제온 플래티넘 8175 프로세서(28코어) 기반 서버와 비교해서 그래비톤 2 기반 서버가 26-54% 향상된 성능을 보여주고 전체적으로 가격 대 성능비가 40% 우수하다고 주장했습니다.
다만 이것이 모두 사실이라고 해도 자체 서버칩을 개발하기 위해서는 만만치 않은 비용이 듭니다. AWS가 워낙 큰 서비스라 내부 수요가 적지는 않지만, 그래도 전 세계 서버를 대상으로 하는 인텔과 AMD의 서버 CPU처럼 규모의 경제를 이룩할 수 있는지는 다소 의문입니다.
더구나 이 회사들은 데스크톱 및 모바일 CPU 아키텍처와 프로세서를 활용하기 때문에 규모의 경제를 이루기가 훨씬 쉽습니다. 서버 CPU 시장의 진입 장벽이 높을 수밖에 없는 이유입니다.
그런데도 아마존의 독자 CPU를 개발한 것은 그럴 만한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구체적인 이유는 밝히지 않았지만, AWS 서비스에 최적화된 제품을 자체 공급하려는 것이 첫 번째 의도일 것입니다. 애플이 퀄컴이나 삼성에서 모바일 AP를 구입하는 대신 독자 모바일 AP를 개발하는 것과 같은 이유입니다.
비용은 들지만, 자사의 하드웨어와 OS에 최적화된 CPU를 확보할 수 있습니다. AWS 역시 자사의 클라우드 서비스에 최적화된 커스텀 CPU 공급이 일차적 목표일 것입니다. 또 자체 CPU를 지니고 있으면 타사 CPU가 갑자기 공급 부족을 겪거나 가격이 올라갈 때도 쉽게 대응하고 가격 협상에서도 유리한 고지를 차지할 수 있습니다.
다만 아마존에서만 내부적으로 사용할 경우 그래비톤의 영향력은 제한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일반적인 예상은 아마존의 머신 러닝 프로세서인 인퍼런티아(Inferentia)처럼 내부적으로만 사용하는 것입니다. 그래비톤은 수많은 고객이 다양한 환경에서 사용할 것을 가정하고 만든 CPU가 아니라 AWS의 서비스에 최적화된 CPU입니다.
이미 입지를 굳힌 인텔이나 최근 점유율을 늘려가는 AMD를 상대로 서버 시장에 도전장을 내밀 때 성공할 수 있을 것이란 보장이 없습니다. 또 서버 CPU 시장에서 치열하게 경쟁할 경우 오히려 마이크로소프트 구글 같은 다른 경쟁자들이 CPU 가격 하락으로 어부지리를 얻을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그래비톤의 영향력은 제한적일 것으로 생각되지만, 실제로 상당한 비용 절감에 성공한다면 이야기는 달라질 수 있습니다. 마이크로소프트나 구글 같은 다른 IT기업들이 자체 제작 ARM 서버 칩에 관심을 보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
렇게 되면 서버 시장에서 인텔과 AMD의 입지가 흔들릴 수 있습니다. 그래비톤의 존재가 업계의 주목을 받을 수밖에 없는 이유입니다.
고든 정 칼럼니스트 jjy0501@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