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빅토리아인들이 가장 사랑하는 아이와 미운털 박힌 엄마 [으른들의 미술사]

작성 2023.11.01 13:45 ㅣ 수정 2023.11.01 13: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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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존 에버렛 밀레이, ‘나의 첫 번째 설교’, 1863, 캔버스에 유채, 92x77cm, 런던 길드홀 아트 갤러리.
[편집자 주: 11월 19일은 아동학대예방의 날이다. 이날은 아동 학대의 예방과 방지에 대한 관심을 높이기 위해 제정된 법정기념일이다. ‘으른들의 미술사’는 11월 한 달 동안 서양 미술 속 아이들을 살펴본다.] 

어린 에피는 다섯 살에 처음 설교를 들으러 교회에 왔다. 꼬마 아가씨는 어찌나 긴장했던지 눈을 부릅뜨고 다리도 힘껏 꼬아 앉았다. 그러나 목사님의 설교가 길어지자 꼬마의 부릅뜬 눈은 감기고, 다리는 풀리고, 고개는 옆으로 떨어졌다. 꼬마 아가씨의 인생 최초의 설교는 이렇게 허무하게 끝나버렸다.

존 에버렛 밀레이(John Everett Millais, 1829~1896)가 사랑스러운 딸 에피를 1년 간격으로 그린 이 그림들은 런던 길드홀 아트 갤러리에 나란히 걸려 보는 사람들에게 엄마 미소를 짓게 한다. 이 작품이 왕립미술원에서 처음 전시되자 사람들은 이 작품을 보기 위해 장사진을 이루었다. 

불륜남녀라는 오명, 축복받지 못한 결혼

이 꼬마 아가씨는 빅토리아인들이 가장 사랑하는 아이였다. 에피는 엄마 이름 에피를 물려받았다. 그런데 하마터면 이 사랑스러운 그림들이 세상에 나오지 못할 뻔 했다. 아니 에피라는 존재 자체가 이 세상에 태어나지 못할 뻔 했다. 에피의 부모는 빅토리아 사회에서 절대로 결혼하지 못할 사이였기 때문이다.

에피는 이미 결혼한 유부녀였다. 에피가 전 남편 존 러스킨을 두고 밀레이와 바람났다는 소문은 빅토리아 상류 사회에 빠르게 번졌다. 표면상 밀레이와 유부녀인 에피가 불륜을 저지른 것은 맞다.

그러나 속을 들여다보면 전혀 다른 이야기였다. 에피는 전남편을 상대로 결혼 무효소송을 진행했다. 이는 이혼이 아니라 결혼 자체를 무효화하는 소송이었다. 왜냐하면 러스킨이 결혼한 후 에피와 부부관계를 맺지 않았기 때문이다.

빅토리아 상류 사회 최대 스캔들을 일으킨 에피와 밀레이는 이후 러스킨에게 승소한 후 결혼했다. 그러나 정당한 결혼 무효 사유와 승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결혼은 축복받지 못했다. 여전히 불륜남녀라는 오명에서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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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존 에버렛 밀레이, ‘나의 두 번째 설교’, 1864, 캔버스에 유채, 97x72cm, 런던 길드홀 아트 갤러리.
아홉 식구를 책임지는 가장의 무게

1855년 밀레이와 에피의 결혼식은 빅토리아 시대 가장 큰 스캔들이었다. 그러나 힘겹게 쟁취한 그들의 사랑은 갈수록 단단해져 밀레이 부부는 한두 살 터울로 8자녀를 두었다.

여덟이나 되는 아이들을 책임져야 했던 밀레이는 자신의 이상대로 그림을 그릴 수 없었다. 밀레이가 왕립미술원 학생이었을 때 고루한 원칙을 고집하는 학교의 방침에 반기를 든 적 있었다.

그러나 이제 밀레이는 아홉 식구가 딸린 가장이었다. 밀레이는 왕립미술원 체제에 순응하기로 했다. 그는 왕립미술원 회원으로서 누구보다 열심이었다. 결국 밀레이는 그가 그토록 반기를 들었던 왕립미술원의 수장이 되었다. 그로서는 명분보다 사랑하는 아내와 아이들을 부양하는 일이 더 중요했기 때문이다. 

성공한 남편, 그러나 여전히 미운털 박힌 부인

1885년 7월 빅토리아 여왕은 밀레이의 업적과 헌신에 대한 보답으로 밀레이에게 준남작 지위를 하사했다. 그러나 기사 서임식에 아내 에피는 초대받지 못했다.

30년이 흘렀어도 에피에게는 여전히 불륜녀라는 꼬리표가 붙어 있었다. 에피는 빅토리아 시대가 강조한 조강지처의 덕목을 수행하지 않아 국민들로부터 미운털이 제대로 박혔다.


밀레이는 1896년 왕립미술원 수장이 된 후 얼마 안 가 후두암으로 사망했다. 정부는 밀레이에 대한 예우로 성 바울 성당에 안치시켰다. 남편을 잃은 에피 역시 이듬해 사망했다.

밀레이 부부는 따로 묻혔지만 금슬 좋은 부부의 예로 현대 영국인들의 기억 속에 남아있다. 그들의 사랑 이야기는 빅토리아 시기에는 틀리고 지금은 맞는 이야기인가보다.

이미경 연세대 연구교수·미술사학자 bostonmural@yonsei.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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