잇달아 세 아이를 낳고 세 아이 모두 영아기 때 사망한 것을 지켜보아야 했던 사스키아는 티투스 만큼은 어떻게든 지켜야 했다. 사스키아는 자신이 아픈 와중에도 혼자 남을 티투스 걱정을 했다.
죽은 아내의 유언장그러나 어떻게든 아이를 지키려 했던 사스키아는 결핵에 걸려 사망하고 말았다. 렘브란트와 기르체는 아픈 사스키아 몰래 연인으로 발전했으며 사스키아가 사망한 후 둘은 사실혼 관계를 유지했다.
그러나 당시 네덜란드 법으로는 결혼하지 않은 상태로 동거 생활을 할 수 없었다. 또한 사스키아의 유언 때문에 둘은 결혼할 수도 없었다.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렘브란트와 기르체의 관계가 멀어진 것은 1649년 헨드리케(Hendrickje Stoffels)라는 여인이 등장하면서부터였다. 1654년 렘브란트와 헨드리케 사이에서 딸 코넬리아가 태어났다. 렘브란트 하나만을 바라보고 산 기르체는 이제 더 이상 희망이 보이자 않자 렘브란트를 혼인빙자간음으로 소송을 걸었다.
43세의 렘브란트는 스무살 어린 헨드리케와 연인이 되었다. 헨드리케는 티투스를 돌보는 보모로 들어와 살게 되었다. 여섯 살인 티투스는 아직 어른의 손이 필요한 아이였다. 헨드리케 역시 죽은 사스키아의 유언 때문에 렘브란트와 결혼할 수 없었다. 헨드리케는 불평하지 않고 묵묵히 렘브란트 곁을 지켰다.
렘브란트와 헨드리케는 이후로도 사실혼 관계를 유지했다. 헨드리케는 사스키아의 아들 티투스를 자기 자식처럼 살뜰히 보살폈다. 1663년 렘브란트를 안팎으로 보살피던 헨드리케가 사망했다. 1668년 아들 티투스마저 사망했다. 렘브란트 곁에 아무도 없었다.
이미경 연세대 연구교수·미술사학자 bostonmural@yonsei.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