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윤기자의 콕 찍어주는 그곳] 조선 선비 분투기(奮鬪記)…강진 다산초당

작성 2018.04.12 09:47 ㅣ 수정 2018.04.12 09: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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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1. 다산초당에 위치한 천일각. 1978년에 세워진 정자로 다산 유배 당시에는 없었지만, 이 자리에서 흑산도로 유배간 형 정약전을 그리워했다는 기록이 있다.


“폐족(廢族) 집안의 자식으로서 학문마저 게을리한다면 어찌 하겠느냐. 과거를 치를 수는 없을지라도 책을 읽을 기회를 얻게 되었구나”(아들에게 보내는 편지, 정약용)


다산(茶山) 정약용(1762-1836)은 불운하였고 불우하였다. 그의 집안은 신유박해(辛酉迫害. 1801)의 소용돌이 속에서 멸족(滅族)의 위기를 맞는다. 사실 신유박해는 사학(邪學)으로 규정한 천주교의 전파를 막는 것을 명분으로 하고 있지만 실상은 당시 집권세력인 노론 벽파들이 남인 시파를 제거하기 위한 일련의 정치적 숙청이었다. 남인들 가운데 천주교를 믿는 이들이 더러 있었기 때문에 노론들이 이를 트집 잡은 것이었다.

이로써 조선은 다시 한 번 더 세상에 나갈 기회를 놓치게 되었고 조선 후기의 집권 주도층이었던 노론 세력들은 결국 일본에게 나라를 갖다 바치는 망국(亡國)의 주연들이 된다. 나라가 끝모르게 기울어져 가던 조선 후기, 선비 정약용은 전라남도 강진 땅에서 18년 동안 유배 생활을 한다. 조선의 뿌리부터 바꾸어 세계와 교류하고자 하였던 앞선 지식인, 다산 정약용의 삶이 담긴 전라남도 강진의 다산초당(茶山草堂)으로 가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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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2. 다산초당에 이르는 뿌리의 길. 정신만 탄탄하게 남았을 다산의 삶처럼 단단한 뿌리들이 얽히어 있다.


다산은 분명 조선조(朝鮮朝) 여타 선비들과는 다른 삶을 살았다. 양반 구색이나 맞추어볼 심사로 삶을 띄워 보내던 게으른 사대부들과는 달리 정약용은 강진땅 험한 유배지에서도 여전히 정갈한 삶을 이어 나갈 정도로 타고난 선비였다.

다산은 일찌감치 동년배들 사이에서는 두각을 나타내던 인물이었는데, 1762년 경기도 남양주시에서 태어난 그는 이미 4살 때에 천자문을 익힐 정도로 문재(文才)가 비상하였다. 1789년 봄 대과에 차석으로 급제한 정약용은 초계문신(抄?文臣)의 칭호를 얻어 예문관 검열에 임명이 되면서 승승장구의 삶을 살아갈 것 같았다. 그도 그럴 것이 다산은 정조(正祖. 1752-1800)가 가장 아끼던 젊은 신하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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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3. 다산초당의 모습. 1958년에 정면 5칸,측면 2칸으로 기존의 초가를 기와를 얹은 집으로 바꾸었다. 유배 당시의 집은 아니다.


그는 1789년 한강의 배다리를 만드는 공사의 규제를 만들어 한강의 주교(舟橋)를 설계하였을 뿐만 아니라, 1796년에 축조한 화성 성곽을 올리는 공사에서 거중기를 이용하여 일을 수월하게 하였으니 정조 임금의 눈에는 꼭 들어맞는 신하임에는 분명하였다. 하지만, 정조가 세상을 떠난 후 그의 삶은 대변혁을 맞게 된다.

정조임금이 승하한 뒤 바로 순조(純祖. 1790-1834)가 1800년에 즉위하고 정순대비 김 씨가 수렴청정하면서 천주교도에 대한 박해가 본격화된다. 이 와중에 다산과 가까이 교유(交遊)하였던 이가환, 권철신, 이승훈, 최필공 등과 아울러 친형인 정약종마저 목숨을 잃는다. 정약용과 정약전은 가까스로 죽음을 면하여 각기 유배의 길을 떠나게 되고, 정약용은 1801년 11월에 강진 땅에 도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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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4. 다산 초당 앞의 차를 끓여서 먹던 바윗돌. 다조라고 부른다. 솔방울로 불을 내어 차를 끓였다.


다산이 처음 강진 땅에 머문 곳은 바로 동네 주막이었고, 후일 그는 이 주막에 사의재(四宜齋)라는 이름을 붙여 고마움을 표하기도 하였다. 이후 다산은 고성사의 보은산방, 제자인 이청의 집 등등을 전전하다가 외가(外家)인 해남 윤씨 자손들의 공부방으로 사용되던 강진 땅 만덕산 언저리 야트막한 야산인 다산(茶山)의 산정(山亭) 주변에 초당을 짓는다. 다산초당이 만들어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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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5. 다산의 영정. 전남 강진군이 제작한 이 초상화는 이례적으로 안경을 쓴 모습이어서 새롭고 신선한 느낌을 준다.


그는 이곳에서 저술에 몰두한다. 조선의 사회 현실을 비판하고, 개혁안을 정리하는 데 우선 대표적인 목민관들의 지침서인 <목민심서(牧民心書)>를 비롯하여, 행정 기구의 개편을 비롯하여 모든 제도의 개혁 원리를 제시한 <경세유표(經世遺表)>, 죄와 형벌에 관한 <흠흠신서(欽欽新書)> 등을 포함하여 약 500여권 이상의 책을 갈무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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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6. 다산초당 뒤의 약천. 다산이 직접 파서 만든 것으로 단 한 번도 물이 마르지 않아 다산의 사랑을 많이 받은 장소였다.


현재 남아 있는 다산초당은 다산이 머물렀던 때의 초당(草堂)이 아니라 1958년 사적 제107호로 지정받으면서 초가를 허물고 정면 5칸, 측면 2칸의 기와집으로 중건한 것이어서 실제 그의 삶의 흔적을 그대로 확인할 수는 없다. 하지만, 그가 머물던 초당의 자리에서 그가 품었음직한 삶의 회한과 슬픔은 충분히 느낄 수 있다. 특히 다산초당에 오르는 뿌리의 길은 그가 머물던 당시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어 관람객들에 여전히 깊은 여운을 준다.

<다산초당에 대한 여행 10문답>

1. 꼭 가봐야 할 정도로 중요한 여행지야?

- 강진 땅을 밟게 된다면, 불우한 조선 선비의 삶을 이해하려면.

2. 누구와 함께?

- 역사적, 문학적 지식을 나눌 수 있는 지인들과 함께라면 더더욱 좋다.

3. 가는 방법은?

- 전라남도 강진군 도암면 다산초당길 68-35 / 귤동마을에 내려 걸어올라가야 한다.

4. 감탄하는 점은?

- 다산초당에 이르는 길. 흔히 뿌리의 길이라고 불리며 다산초당의 진짜 모습이라고 일컫는다.

5. 명성과 내실 관계는?

- 강진 땅에서 제일 많은 관광객이 다녀가는 곳. 평일은 한산하다.

6. 꼭 봐야할 장소는?

- 천일각, 동암, 연못. 뿌리의 길

7. 토박이들이 추천하는 먹거리는?

- 한정식 ‘설성식당’. ‘수인관’ ‘해태식당’ ‘제일식당’ ‘청자골 종가집’ ‘남문식당’

8. 홈페이지 주소는?

- http://korean.visitkorea.or.kr/kor/bz15/where/where_main_search.jsp?cid=126419

9. 주변에 더 볼거리는?

- 두륜산 대흥사, 고산 윤선도 기념관, 해남우항리공룡화석지, 땅끝마을

10. 총평 및 당부사항

- 다산초당에 이르는 뿌리의 길이 바로 다산의 삶을 만날 수 있는 공간이다. 몸으로 전해오는 다산이 겪었던 삶의 흔적들. 다산초당이 목적지가 아니라 다산초당에 이르는 뿌리의 길을 꼭 밟아 보도록. 눈물겹다.

글·사진 윤경민 여행전문 프리랜서 기자 vieniame2017@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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