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의 거대한 능선이 남과 북으로 크게 굽이치는 곳, 그 중심에 해발 1732m의 반야봉이 묵묵히 솟아 있다. 주봉인 천왕봉(1915m)이 하늘을 받치는 기둥처럼 웅장한 위용을 자랑한다면, 반야봉은 그 곁에서 마치 깊은 수행에 든 구도자처럼 지리산의 광활한 산군을 온전히 관조하고 있다. 지리산의 3대 주봉이자 제2봉인 반야봉은 천왕봉과는 또 다른 차원의 고요와 깊은 사색의 공간으로 산객들을 이끈다.
반야봉이라는 이름에는 깊은 불교적 서사가 담겨 있다. ‘반야’(般若)는 산스크리트어로 지혜를 뜻하며, 세상의 도리를 깨닫는 근원적인 지혜를 의미한다. 전하는 설화에 따르면 옛날 지리산에 살던 반야라는 사람이 지혜를 얻기 위해 정성을 다해 기도했다는 이야기, 혹은 지리산의 산신인 천왕봉의 여신을 사모하던 반야라는 사냥꾼의 애달픈 전설이 얽혀 있다. 이름이 지닌 무게만큼이나 반야봉에 올라서면 세상의 소란함이 일순간 사라지고, 오직 나 자신과 대면하게 되는 맑은 지혜의 순간을 마주하게 된다.
반야봉은 천왕봉의 화려함 뒤에 숨은, 지리산의 진정한 지혜를 상징하는 봉우리다. 누군가는 천왕봉을 향해 앞만 보고 달릴 때, 반야봉에 올라선 이는 굽이치는 산맥의 곡선을 바라보며 자연의 순리와 삶의 무게를 깊이 헤아린다. 거친 숨을 몰아쉬며 오른 정상에서 마주하는 정적은 우리가 잊고 지냈던 스스로의 내면을 비추는 거울과도 같다. 지혜를 뜻하는 봉우리의 이름처럼 반야봉은 오늘도 묵묵히 구름 위에 서서 찾아오는 이들에게 삶을 통찰하는 맑은 시선을 선물하고 있다.
반야봉으로 향하는 길은 지리산의 속살을 가장 깊숙이 들여다보는 과정이다. 노고단에서 시작해 임걸령과 노루목을 지나 정상으로 이어지는 능선은 지리산 종주의 핵심 구간으로, 사계절 내내 변화무쌍한 풍경을 선사한다. 특히 여름철 산철쭉이 능선을 따라 붉게 번져나갈 때면 반야봉은 거대한 꽃의 섬으로 변모한다. 노루목에서 정상으로 향하는 가파른 계단을 오르다 보면 어느덧 발아래로 구름 바다가 일렁이며 지리산의 능선들이 섬처럼 떠다니는 신비로운 풍경이 펼쳐진다. 정상에 서서 바라보는 사방의 조망은 지리산이 왜 민족의 영산이라 불리는지, 그 광활한 기개와 깊이를 온몸으로 실감하게 한다.
산행 후 지리산 자락에서 맛보는 음식은 반야봉의 여운을 더욱 진하게 남긴다. 전북 남원시 산내면이나 전남 구례군 일대에서 맛보는 지리산 산나물 정식은 그야말로 자연의 선물이다. 맑은 계곡 물에서 자란 나물들이 내뿜는 향긋함은 산행으로 지친 몸을 달래기에 더할 나위 없다. 쌉싸름한 산채와 함께 곁들이는 따뜻한 밥 한 그릇은 험준한 산길을 묵묵히 걸어온 산객에게 꿀물과도 같다. 산 아래 고즈넉한 민박에서 하룻밤 묵으며 듣는 지리산의 밤바람 소리는 반야봉에서 얻은 평온을 일상의 공간으로 가져가는 특별한 징검다리가 되어준다.
글·사진 김희중 칼럼니스트 iong5636@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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