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방의 제재를 받고 있는 러시아가 금융 제재를 피해 위조 서류 및 페이퍼컴퍼니 등을 통해 무려 9조원이 넘는 자금을 국제 금융망으로 송금한 정황이 드러났다.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의 22일(현지시간) 보도에 따르면 매체가 입수한 내부 자료 분석 결과 크렘린궁의 지원을 받는 핀테크 기업 A7이 최소 69억 달러(한화 약 9조 3300억 원)를 글로벌 은행들을 통해 송금한 것으로 확인됐다.
A7은 몰도바 출신 재벌 일란 쇼르가 러시아 국유은행 프롬스뱌지반크(PSB)의 지원을 받아 설립한 결제업체다. 러시아가 2022년 2월 우크라이나 침공 전쟁을 일으킨 뒤 주요 은행들의 국제은행간통신협회(SWIFT·스위프트) 접근이 차단되자 대체 결제망 역할을 해왔다.
크렘린궁과 A7의 수법은 치밀했다.
A7은 아랍에미리트(UAE)와 홍콩, 키르기스스탄, 인도네시아 등에 위장회사를 세우고 이들 명의로 국제 은행 계좌를 확보했다. 이후 실제 거래인 것처럼 꾸민 송장을 만들거나 기업 도장을 위조해 자금의 출처와 목적을 숨겼다.
해당 방식으로 홍콩 스탠다드차타드 계좌에 유입된 금액은 11억 달러(약 1조 5000억원)에 달했다. UAE 퍼스트아부다비은행(FAB) 계좌에서는 18억 달러(약 2조 4400억원) 이상의 해외 송금이 이뤄졌다. 씨티그룹·도이체방크·JP모건체이스·DBS 등의 금융망도 거래 과정에 등장했다.
“민감한 전쟁 관련 물품 거래”러시아 당국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으로 알려진 A7의 일부 거래는 군사 장비와 러시아 보안 기관의 물품 구매 등 전쟁 관련 거래와 연결된 것으로 나타났다.
FT는 “A7은 암호화폐를 활용한 새로운 결제망이라고 홍보해 왔지만 실제로는 위조 서류와 위장회사를 이용하는 전통적 자금세탁 수법을 대규모로 활용했다”며 “A7을 통한 거래 중 일부는 매우 민감한 전쟁 관련 물품과 연결돼 있었다”고 지적했다.
이어 “해당 거래에 군사 장비와 러시아 보안 기관이 구매한 물품이 포함돼 있었다”며 “A7 내부 문건과 직원들의 대화를 통해 러시아와 관련된 거래의 실제 목적과 품목을 금융기관에 제출하는 서류에서 다른 내용으로 표시하는 사례가 확인됐다”고 덧붙였다.
실제로 2025년 2월 중국에서 야간투시경 500개를 구매한 약 51만 달러 규모의 거래는 러시아 고객을 대신해 이뤄진 것이었다. 당시 A7 직원들은 해외 은행이 거래 품목을 확인할 경우 실제 제품인 ‘야간 투시경’을 그대로 기재할지 논의하다가 결국 ‘강화유리’로 적었다는 내용의 대화를 나눈 것으로 알려졌다.
FT는 “A7 직원들의 내부 대화에 따르면 해당 거래에서 품목을 ‘신발’로 표시하는 방안도 거론됐지만, 이 회사가 과거에 카메라와 광학제품을 구매한 기록이 있어 갑자기 신발을 구매하는 것으로 표시하면 은행이 의심할 수 있다는 의견이 나왔다”고 전했다.
매체가 입수한 자료에 따르면 A7의 거래는 러시아 보안 기관이 구매한 물품과도 연결돼 있었다.
FT는 “해당 거래들은 러시아의 군사·안보 분야와 관련된 것으로 분류될 수 있는 민감한 거래였다”면서 “A7의 금융망이 러시아의 일반적인 기업 거래뿐 아니라 전쟁 및 안보와 관련된 물품의 국제 결제에도 사용됐다는 증거인 셈”이라고 전했다.
이어 “다만 A7을 통해 처리된 전체 거래가 군사·전쟁 관련 거래인 것은 아니었다”며 “69억 달러 규모의 거래 전체 가운데 일부가 전쟁 관련 물품과 연결돼 있었다”고 덧붙였다.
이번 사례는 서방이 러시아의 국제 금융망 접근을 틀어막았음에도 크렘린궁과 연계된 결제망이 제3국과 글로벌 은행을 우회로로 활용한 직접적인 근거로 해석된다.
러시아의 금융 제재 우회에 ‘이용당한’ 것으로 추정되는 관련 은행들은 의심 계좌를 폐쇄했거나 자금 세탁 방지 규정을 준수하고 있다고 밝혔다.
미국 “러시아산 에너지 수입하는 제3국에 추가 관세”한편 최근 미국은 러시아산 석유와 천연가스를 수입하는 제3국에 최대 100%의 추가 관세를 부과할 수 있도록 하는 새로운 대러 제재 법안을 내놓았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지난 18일(현지시간) 미 의회를 통과한 ‘2026 린지 O. 그레이엄 러시아·이란 제재법’에 서명했다.
이 법은 러시아산 원유나 천연가스를 수입하는 제3국에 최대 100%의 추가 관세를 부과할 수 있도록 하는 내용이 포함돼 중국과 인도 등이 주요 적용 대상이 될 수 있다는 관측이 나온다.
중국은 다음 날(19일) 입장문을 통해 “중국은 국제법적 근거가 없는 일방적 제재에 일관되게 반대한다”며 “제3자와 관련됐다는 이유로 다른 국가에 이른바 2차 제재를 가하는 것에도 반대한다”고 밝혔다.
인도 외무부도 성명을 통해 “미국의 해당 법안과 관련해 우리는 인도와 미국 양국 관계뿐만 아니라 국제 에너지 시장에 미칠 잠재적 영향에 관해 매우 명확하게 입장을 밝힌 바 있다”며 우려를 나타냈다.
송현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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