으른들의 미술사

새벽은 밝아 오는데 [으른들의 미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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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헨리 푸젤리, ‘아침 어스름 속의 고독’, 1794-1796, 캔버스에 유채, 95x102㎝, 취리히 쿤스트하우스


●잠든 목동과 이상한 슬픔

서양 미술에서 잠든 사람은 낯설지 않은 소재다. 하지만 헨리 푸젤리(1741~1825)의 ‘아침 어스름 속의 고독’을 마주하면 평범한 잠과는 다른 기운이 느껴진다. 어둠이 완전히 물러나지 않은 새벽, 한 남성이 깊은 잠에 빠져 있고 곁에는 개가 자리한다. 남성은 주변 세계와 단절된 듯 고요하다. 화면에는 사건을 설명하는 인물도, 이야기를 이끌어 가는 극적인 행동도 없다. 그런데도 그림에는 설명하기 어려운 슬픔과 묘한 긴장감이 감돈다.

제목인 ‘아침 어스름 속의 고독’은 작품의 분위기를 나타낸다. 아침이 밝아 오지만 어둠은 아직 남아 있고, 잠든 남성과 곁을 지키는 개는 미동조차 없다. 슬픔을 직접 드러내는 인물도, 비극을 암시하는 극적인 사건도 없지만 관람자는 이 장면에서 불안과 상실의 기운을 느낀다. 고독은 단순히 혼자 있다는 사실만을 뜻하지 않는다.

●문학에서 태어난 고독

영국에서 활동한 푸젤리의 그림을 이해하는 열쇠는 영국 문학에 있다. 스위스 취리히에서 태어난 그는 신학을 공부하고 목회와 번역에 종사하다가 1764년 영국으로 건너갔다. 이후 문학과 신화, 인간의 공포와 상상력을 독창적인 이미지로 표현하며 명성을 얻었다. 그의 작품은 눈에 보이는 현실을 재현하는 데 그치지 않고 인간의 내면에 자리한 불안과 환상의 세계를 탐색한다.

이 작품은 존 밀턴의 시 ‘리시다스’와 연결해 해석되기도 한다. 이 시는 밀턴의 친구가 배가 난파되어 사망한 일을 계기로 탄생했다. 밀턴은 친구를 목동 리시다스로 바꾸어, 목가적인 자연을 배경으로 젊은이의 죽음, 슬픔과 상실, 삶의 덧없음을 노래했다.

푸젤리의 잠든 목동 역시 이러한 문학적 배경 속에서 바라볼 수 있다. 다만 그림은 시의 비극을 그대로 재현하지 않는다. 배의 난파 장면이나 죽음의 순간 대신 잠든 인물과 희미한 아침 빛을 내세워, 삶과 죽음의 경계에 놓인 듯한 모호한 분위기를 만들어 냈다. 인물이 잠에서 깨어날지, 아니면 영영 눈을 뜨지 못할지 그림은 끝내 알려 주지 않는다.

●잠과 깨어남 사이

아침의 희미한 빛은 밤의 어둠을 밀어내지만, 인물의 내면까지 밝혀 주지는 못한다. 푸젤리는 극적인 사건이나 기괴한 형상 없이도 익숙한 풍경을 낯설게 바꾸며 인간의 내면에 자리한 불안과 고독을 드러낸다. 밤과 낮이 교차하는 시간은 잠과 깨어남, 무의식과 의식이 맞닿는 경계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 그림에서는 그 경계가 선명하지 않다. 잠든 남성은 평화롭게 쉬는 사람처럼 보이면서도 어딘가 돌아올 수 없는 세계에 머무는 듯하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순간에도 인간의 내면은 이토록 낯설고 불안한 순간이 될 수 있다. 새벽은 조금씩 밝아 오는데, 잠든 남자의 슬픔은 여전히 그 자리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이미경 연세대 연구교수·미술사학자 bostonmural@yonsei.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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