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지 않는 아이
어린아이가 풀밭에 무릎을 꿇고 두 손을 모으고 있다. 주변에는 작은 흰 꽃들이 피어 있지만, 소년은 꽃을 꺾거나 풀밭을 뛰어다니지 않는다. 스위스 화가 페르디난트 호들러(1853–1918)가 그린 ’경배‘는 이처럼 낯선 장면에서 출발한다.
아이가 풀밭 위에서 놀고 있다는 사실은 전혀 이상하지 않다. 그러나 그곳에서 아이가 취한 행동은 어딘가 어색하다. 어린아이라면 호기심을 보이거나 주변을 두리번거릴 법한데, 소년은 마치 기도가 몸에 밴 사람처럼 차분하게 행동한다. 소년의 몸짓에는 망설임도 없고, 어설픔도 없다. 아이의 얼굴과 자세에서 장난기나 천진난만함을 찾으려 해도 좀처럼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오히려 어른에게서 기대할 법한 엄숙함과 경건함이 어린 몸에 깃들어 있다.
기도하는 아이 그림은 종교화에서 낯선 소재가 아니다. 호들러는 어린아이가 기도하는 모습을 특별한 사건이나 극적인 종교 장면으로 꾸미지 않았다. 그는 그저 풀밭에 무릎을 꿇은 소년을 보여 준다. 그런데 그 단순한 장면에서 아이에게 기대하는 생동감이 사라져 있다. 소년은 어린아이이면서도 어린아이답지 않다. 바로 그 어긋남이 그림을 기묘하게 만든다.
●너무 조용한 세계
이 작품의 고요함은 단순히 주변에 사람이 없어서 생기는 분위기가 아니다. 소년의 몸짓과 자연이 어우러지면서 화면 전체가 현실의 시간에서 벗어난 듯한 인상을 준다. 아이가 무릎을 꿇은 풀밭은 놀이의 장소가 아니라 경건한 의식을 위한 공간처럼 보인다. 제목인 ‘경배’는 이러한 분위기를 더욱 낯설게 만든다.
이 그림 어디에도 신이나 이야기를 설명해 줄 성서 속 인물도 없다. 호들러는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상징적인 인물과 몸짓으로 표현했다. 아이의 행동은 지나치게 진지하고, 주변 세계는 지나치게 고요하다. 마치 이곳에서는 시간도, 놀이도, 움직임도 잠시 멈춘 듯하다. 이처럼 이야기를 짐작하게 해 줄 단서가 줄어들수록 관람자는 오히려 소년의 자세를 오래 바라보게 된다.
●아이의 얼굴에서 사라진 것
호들러의 그림에서 소년은 단순히 기도하는 어린 모델에 머물지 않는다. 그는 인간이 자연 앞에서 느끼는 경외심을 드러내는 상징적인 존재로 읽을 수 있다. 실제로 이 시기 호들러는 아들 헥토르를 모델로 삼아 어린아이의 모습을 여러 차례 그렸다. 호들러는 실제 이 무렵 아이들의 어리광이나 떼쓰는 순간을 그리지 않았다. 어린아이의 몸을 하고 있으면서도 놀이와 호기심을 드러내지 않는 모습은 자연스러운 성장의 한순간이라기보다 어떤 이상적인 상태에 가까워 보인다.
소년은 무엇인가를 간절히 바라는 것인지, 이미 초월적인 존재와 마주한 것인지 알 수 없다. 그 표정과 몸짓은 관람자에게 구체적인 감정을 전달하기보다 쉽게 이름 붙일 수 없는 정적을 만들어 낸다. 호들러의 ‘경배’가 이상한 그림인 이유도 여기에 있다. 아이를 그렸지만 어린 시절의 활기를 보여 주지 않고, 기도를 그렸지만 기도의 대상도 알려 주지 않는다. 자연을 배경으로 삼았지만 자연을 향유하는 인간의 모습도 보여 주지 않는다.
그림 속 소년은 너무나 조용해서 오히려 현실의 아이와 멀어진다. 우리는 아이에게서 천진함과 생기를 기대하지만, 호들러는 그 자리에 엄숙함과 침묵을 놓았다. 소년이 무엇을 바라보는지 끝내 알 수 없더라도 한 가지는 분명하다. 이 풀밭에는 아이의 웃음소리 대신 설명하기 어려운 성스러운 고요함이 머물고 있다. 그 고요함은 평화로우면서도 어딘가 불편하고, 순수해 보이면서도 낯설다. 어린아이의 모습에서 아이답지 않은 무언가를 발견하는 순간, 평범한 기도 장면은 기묘하고 낯선 그림으로 바뀐다.
이미경 연세대 연구교수·미술사학자 bostonmural@yonsei.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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